봉개동 민오름(표고 651m) 정상에서 촬영했다.막 떠오른 태양, 햇살이 비치는 드넓은 교래 자연휴양림 너머로, 26년 전 4.3 사건의 참상을 알린 다랑쉬굴을 품은 다랑쉬오름이 북동쪽 맨 끝자락에 봉긋이 솟아있다. 옆으로 높은오름, 백가지 약초가 자란다고 해서, 백약이오름과 뒤로 좌보미오름도 삐죽이 능선을 내밀었다. 샘에서 물이 한라산쪽으로 향해 거슬러 흐른다하여 거슨샘이오름, 2007년 6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 저멀리 오른쪽으로 영주산이 있고 대록산도 보인다. 초겨울치곤 맑은 날씨라서 운 좋게 동부지역의 오름 군락
檀紀 4287년 5월 27일呱呱의 聲을 울린 이래우리에게는찬란한 龍淵시대가 있었다여기, 아랏벌시대 大跳躍이 있다 學徒의 이름으로젊음의 순수를 구가하던학문과 연구에 몰두하던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던문화예술을 꽃피우던아, 사랑과 낭만을 갈구하던그 오랜 세월의 흔적 그러나 날로 새로운 喊聲의 역사또는 조용조용한 革新의 깃발이紙齡 1000호, 제주대신문여기에 있다 한 층 또 한 층 켜켜이 쌓아온濟州大人의 大同!뜨거운 심장에서 흘러나온피톨피톨의 결정체여기 빛나고 있다深淵의 순수함으로미래를 여는 힘찬 박동으로빛나고 있다고동치고 있다 질곡의 세
제주대신문이 1000호를 맞아 좌담회를 개최했다. 좌담회는 11월 28일 오후 6시 본관 3층 제주대신문 편집국에서 김태연 특별기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좌담회에는 김범훈 제주대신문동우회장, 서영표 주간교수, 문성빈 총학생회장, 이숭신 제주대신문 편집국장, 장수현 제주대 교육방송 편성국장, 박양범 독자, 김태연 특별기자가 참여해 ‘제주대신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제주대신문이 1000호를 맞이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김범훈 동우회장: 제주대신문이 1954년 5월 27일 창간해서 벌써 1000호가 됐
1976년,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42년 전에는 제대신문을 인쇄소에서 찍었다. ‘평판인쇄’라 해서 신문반절 4면을 하나하나 조판한 뒤 다시 한 면씩 4번을 찍어야 겨우 4면짜리 신문 한 장이 인쇄되는 방식이었다. 이러니 4면짜리 신문 한 장을 찍어내려면 짧게는 10일, 길면 보름을 넘기기가 다반사였다.재임기간에 월간 발행을 정착시키고 2-3년 안에 월 2회 발간을 이루고 말리라는 목표를 세웠던 나로서는 답답하고 조바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창간호부터 계속 신문을 찍어온 대학선배가 운영하는 인쇄소를 마냥 닥달할 수도
군부독재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당시엔 제주대신문에선 학우들이 목마르게 갈구하던 통렬한 사회 비판과 감시기능이 담긴 신문을 만들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 주간교수의 철저한 감시와 레이더망 같은 사전검열제도는 우리의 목을 죄는 것 같았기에 신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매번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그 무렵 제주대신문에선 봄이란 단어와 자유, 민주화라는 용어조차 발견 할 수 없을 정도로 보도통제가 심했기에 신문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매번 가위질 당하는 아픔 때문에 쓴 소줏잔을 들고서 울분을 터트리던 일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참다못한
30여 년 전의 일이다. 제대신보 기자들은 성산포항에서 우도를 잇는 도항선 ‘자연호’에 몸을 맡겼다. 부챗살 같은 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바다를 가르는 바람은 싱그러웠다. 기자들의 하계연수를 겸한 특집 취재를 위해서다. 기름 냄새 가득한 배는 20분가량을 몸살 앓듯 힘겹게 통통거리고 나서 우리 일행을 우도의 천진항에 내려주었다. 우도는 참 아름다웠다, 꺼억 대며 우리를 반기는 갈매기 떼, 초록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신록으로 빛나는 우도봉, 은 싸라기로 온통 반짝이는 산호해수욕장, 바다 곳곳에서 정겹게 들려오는 해녀들의 숨비소
우연히 게시판에 기자 모집 글을 보고 언론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도전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수습기자가 되면서 고민도 많아졌다. 그리고 전공 공부, 학점 관리, 세계화 시대의 필수 조건인 영어 성적, 아르바이트 등 바쁜 일상과 함께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불안감,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수습시절은 혼자만 분주하고 바빴던 시절이었다..그러나 그것은 비단 나 혼자 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신문사에 몸담은 많은 사람이 겪게 되는 과정이자 수시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음을 기자와 데스크를 맡으면서 경험으로 알게
이름도, 얼굴도 알수 없는 후배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제주대신문 지령 1000호 기념호 발간에 실을 글을 써달라는 것이다. 주제는 과거 대학신문사 재직시절 에피소드. 순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후배들의 애로사항을 30년전 경험했기에 “네”라는 대답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1987년 6월부터 1990년 2월까지 3년간 대학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원고 청탁은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다. 1학년 수습기자때는 선배들의 지시사항만 이행하면 능력자로 평가됐지만 2학년 정기자로 활동할때는 기사 취재ㆍ작성 못지 않게 3학년 편집
그는 ‘빨간펜’ 선생님이였다.대학시절 남자친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그는 늘 빨간 색연필을 들고 있었다.흰 종이에 인쇄된 기사를 건네면 이곳저곳을 붉게 색칠했던 그였다. 처음 기사를 쓰고 그의 조언을 기다렸을 때에는 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A4 용지가 원래 빨간색인 것 마냥 시뻘개져서 돌아왔다. 쓰는 기사가 점점 많아질수록 붉은 표시는 조금씩 사라졌다. 흰 종이가 그 어떤 표시도 없이 깨끗한 흰 색으로 돌아온 날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마치 내가 뭔가 이뤄낸 기분이 들었다.기사가 붉은 색을 넘어 특정부분이 반복해 색칠돼
얼마 전 오랜만에 일이 있어 들린 제주대 학생회관 1층에서 식권판매소 옆에 진열된 UI 상품을 봤다. 제주대학교 UI가 새겨진 다양한 상품들을 보며 문득 십여 년 전 대학시절 활동했던 제주대신문 학생기자 시절이 생각났다.호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가득한 성격이라 대학생활이라는 설렘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제주대신문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입사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고 시작된 신문사 생활은 사실 매일 아침 8시 20분 조회를 시작으로 오후 6시 종례로 끝나는 여느 직장
제주대신문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학과 엠티를 다녀왔던 어느 날이었다. 술이 좀 덜 깨었을 때였던 것 같다. 대학 이곳저곳을 걷다가 대자보 하나를 봤다. 신문사 수습기자 모집 내용이었다. ‘신문사’ 라는 신묘한 단어의 힘에 이끌려, 두근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대학신문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입사원서를 냈다.사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교사를 꿈꿨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대학신문 기자가 돼있었고 점차 꿈이 바뀌었다. 기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정신없이 대학생활
1977년 5월 2일자(154호) “수의학과 전국석권”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장덕지(수의학과 73학번)동문의 이름을 정덕지로 보도했습니다. 이에 정덕지를 장덕지로 바로 잡습니다. 2018년 9월 장덕지(수의학과 73학번) 동문이 정정보도를 요청하기 위해 제주대신문 편집국을 방문했다. 그는 1977년 2월 19일에 실시한 수의사 자격 국가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40년이 흐르고서야 정정보도를 요청한 장덕지 동문을 만났다.▶ 40년이 흘렀는데 잘못 보도된 기사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됐는지.- 1977년 수의사
오는 12월 5일 수요일은 제주대신문 제1000호가 나오는 날이다.제주대신문은 1954년 5월 27일 창간해 현재까지 학생들에게 학교 곳곳에 소식을 전해주는 고마운 친구와 같은 존재다. 학생들을 위해 애써준 오랜 친구에게 심심한 축하를 전한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멋진 친구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제주대신문을 어디서 볼 수 있고 구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자성어 중에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뜻이다. 제주대신문이 학생
제주대학교를 대표하는 언론기구 제주대신문이 1000호를 맞았다.올해 읽은 기사 중 학내 가장 큰 행사인 아라대동제와 학생회 선거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 깊었다.아라대동제가 끝난 후 제주대신문은 축제기간 전후로 화두였던 교육부의 ‘교내 주류 판매 금지 권고’ 이후 학생들이 축제를 즐기는 문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하게 담았다. 축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시행한 ‘축제 휴강’ 등의 제도가 실제 행사 참여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분석했다. 제주대신문의 더 나은 축제를 만들기 위한 분석은 매우 진지했으며 정성이 느껴졌다.또한 학생회
얼마 전 제2도서관에서 우연히 로비에 비치된 제주대신문을 집었다. 무려 999호. 적지 않은 숫자다.제주대신문은 제주대학교와 함께 걸어온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제주대신문은 이곳저곳 진열대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기자들 스스로도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신문은 전보다 얇아지고 있다. 신문이 교내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대로 가면 신문 지면의 크기도 작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교직원 포함)는 학교신문에 관심이 없다. 언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제주대
대학신문이 학생들은 물론 대학 내에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던 때가 있었다. 1980~90년대 중반까지 대학신문은 대학과 지역사회를 향한 날 선 비판을 담은 공론장이었다. 또 하나의 대학문화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지로서의 기능도 톡톡히 했다. 시간이 흘러 인터넷과 SNS 등의 미디어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환경 변화는 대학신문의 존폐를 위협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저널리즘의 영역과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꿔 놓았다. 개인의 미디어 사용 능력과 표현 능력이 무한대로 확장되면서 신문으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는 퇴물로 전
제주대신문은 1000호 발행을 맞아 본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11월 26일부터 28일까지 총 3일간 ‘제주대 신문에 대한 인식조사’를 실시했다. 해당 설문에서는 △신문 열독률 현황 △학내정보 접근 실태 △기사 및 지면 평가 △보완할 점 등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 결과 총 366명의 학생이 응답했다. 설문조사에 응한 366명은 남성 177명(48.4%), 여성 189명(51.6%)으로 비슷한 성비를 나타냈다. 학년은 1학년이 133명(36.3%)으로 가장 많았고, 2학년 90명(24.6%), 3학년 88명(24%), 4학년 이상 5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