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섬으로 가는 길 - 대만을 가다

제주대신문의 ‘평화의 섬으로 가는 길’ 대만 취재팀은 지난 2월 5일부터 8일까지 4일간 대만의 수도인 타이페이에 위치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을 돌아봤다. 취재팀은 한류 현장과 대만의 2ㆍ28사건 등을 중심으로 취재했다. 대만 2ㆍ28사건과 제주 4ㆍ3사건은 공통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영문도 모른채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1947년 2월 수만명의 대만 민중이 국민당 정부의 폭정에 항거하다 참혹하게 살해됐다. 2월28일 학살이 시작돼 ‘2ㆍ28사건’으로 부르는 이 대만판 ‘4ㆍ3사건’은 독재 정권 40여년간 금기시되면서 ‘민주화 운동’도 ‘항쟁’도 아닌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대만과 외교관계를 끊은 지 22년째 되는 해다. 중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1992년 8월 대만이 단교를 통보하면서 양국의 공식 관계는 끝났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과의 경제적 교류는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양측은 2003년부터 상호 비자를 면제(30일)했으며 2012년 7월부터는 무비자 체류 기간을 90일로 연장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한국을 찾은 대만인은 2008년 35만여명에서 지난해 58만여명으로 매년 크게 늘고 있다. 한류와 한국경제 성장에 따른 무역 증대가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과 대만의 무역액은 2000년 128억9500만 달러에서 2012년 269억2060만 달러로 2배 이상 늘었다.

▲ 평일 낮시간임에도 타이베이 시먼딩 거리에 한류 상품들을 파는 가게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젊음의 거리에 넘치는 한류
 
취재팀은 제주와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시를 하루 한차례 운항하는 대만국적기를 타고 1시간 50여분 만에 타이베이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거리와 광장을 살펴봤다. 찾아나선 곳은 대만대 교정과 시먼딩(西門町) 거리, 스린(士林) 야시장이다. 이 나라 최고 명문대인 대만대와 젊음의 거리, 야시장. 이들 공간에서는 공히 한국이 이야기되고 있었다. 한류의 핵심은 역시 한국대중가요(K팝)와 드라마였다. 현지 방송표를 보니 유독 한국 드라마 방영 숫자가 많다는 점이다. 대만의 3대 드라마 채널인 GTVㆍ둥썬(東森)ㆍ웨이라이(緯來)에서는 이런 한국 드라마가 넘쳤다.
 
타이베이의 젊음의 거리인 시먼딩 거리는 평일 낮시간임에도 수많은 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먼딩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한류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현장 입구에는 한국 연예인들의 브로마이드 사진과 노래들이 외부 스피커를 통해 틀어지고 있었다. 좀 더 걸어가면 음반가게는 물론이고, 책을 파는 서점에서도 각기 다른 한국 노래가 자주 들렸다. 골목으로 들어섰더니, 이번에는 크고 작은 한국 표시가 선명한 음식점과 옷가게들도 다수 나온다. 가게의 주인은 대부분 대만 사람들이다. 주재원과 유학생을 포함하더라도 교민이 3000명 정도인 대만에서, 한국인을 주요 고객으로 여기고 가게를 운영하는 교민은 흔치 않을 것이다.
 
밤에 찾은 곳은 타이베이 시 북부에 위치한 스린 야시장. 타이베이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스린은 의류와 화장품, 액세서리 등 각종 잡화를 취급하는 상점과 끝없이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판매하는 이국적인 간식거리로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도 음식을 먹고 생활용품을 사는 사람들은 한국 CD와 DVD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들 번화가 탐방에 이어 둘러본 곳이 타이베이 중앙역 앞의 학원 밀집가였다. 승진, 편입학, 외국어 학원이 많은 중앙역 인근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곳이 한국어 강좌였다.

▲ 2ㆍ28 화평공원 내에 옛 참의원 건물을 보수한 2ㆍ28국가기념관이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역사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의 아픔 간직한 2ㆍ28기념관
 
1947년 초의 대만은 불만과 동요로 들썩거렸다. 대만에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과 해방과 함께 들어온 중국인들이 뒤섞인 가운데 국민당 대만 총통 천이는 강력한 수탈과 차별 정책을 폈다. 담배, 설탕, 차, 종이, 시멘트 등을 국유화하고 물자 상당수를 공산당과 내전 중이던 본토의 국민당으로 보냈다. 원주민 언어 대신 북방식 중국어를 ‘국어’로 선포했고, 원주민의 공직 진출을 가로막았다. 물자 부족과 부패가 맞물려 물가는 수십, 수백배로 뛰어 올랐다.
 
발단은 2월 27일 타이베이 시내의 한 담배 행상이었다. 전매총국 직원들이 밀수 담배를 팔던 행상 린지앙메이의 담배와 전 재산을 빼앗자 여인은 단속원들에게 온정을 호소하며 사정했지만 항의하는 그의 머리를 권총으로 내려찍었다. 다가오는 군중을 향해 단속원들이 발포했고, 한 시민이 사망했다. 이튿날 군중은 전매총국 타이베이 분국을 점거하고 서류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헌병대는 비무장 군중에 총을 난사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점령하고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대만인의 자치권과 진압군의 항복을 요구했다. 항쟁은 타이베이를 넘어 대만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 갔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방송국을 점거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당황한 행정장관은 구속자 석방과 발포 금지, 사건의 진상조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였다. 3월 4일 천이 총통의 요청으로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상륙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날 밤 라디오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군대는 무차별적인 진압에 돌입했다. 통행금지가 내려진 가운데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은 그대로 총을 맞고 쓰러졌다. 군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골목에는 시체가 쌓였다. 산으로 도망친 주민들은 추격군에 붙잡혀 죽어갔다. 그해 5월 16일까지 대만 전역에서 수만명이 학살됐다. 피해자 규모가 1만~2만명이라는 이야기부터 10만~20만명이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2ㆍ28사건’은 1995년 대만 총통 리덩후이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국가 차원의 배상을 약속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리덩후이 총통은 이전부터 정부 산하에 2ㆍ28사건 연구와 해결방안을 위한 전담기구 구성을 지시했다. 1991년 1월 정부 행정원(총리실) 산하에 ‘2ㆍ28사건 전담 소위원회’가 구성됐고, 이 기구가 1년여의 진상조사를 거쳐 1992년 2월 「2ㆍ28사건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40만자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 경위, 진압과정, 피해상황 등을 기록한 본문 2권에다 당시 관련자의 증언과 역사자료 등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집 10권으로 구성됐다. 이 보고서는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집계할 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망ㆍ실종자가 1만8000~2만8000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 이전에 대만 군 당국이 밝힌 사건의 피해자는 사망 408명, 부상 2131명, 실종 72명에 불과했다. 대만 입법원(의회)은 1995년 2ㆍ28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법안을 통과시켜 1인당 최고 대만돈으로 6백만위안(약 1억8천만원)까지 보상해 주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대만정부는 종전 참의원 건물을 ‘2ㆍ28국가기념관’으로 마련했고, ‘2ㆍ28기념우표’까지 발행했는가 하면 교과서에도 2ㆍ28사건을 등재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제주4ㆍ3사건 보다 더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2ㆍ28 과거사를 정리한 셈이다. 그러나 38년의 계엄령 기간에 2ㆍ28사건은 금기시되면서 사건의 피해자도,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대만 영화감독 허샤오시엔은 1989년 ‘2ㆍ28사건’을 다룬 첫 영화 <비정성시>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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