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라봉사단 소록도 봉사활동 취재기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소록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일렬로 서있고 그 사이 사이로 보이는 바다경관이 휴양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이 섬에는 한센인들의 아픔과 삶의 애환이 어려 있다.
 
‘소록도 환자들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한 번은 한센병 발병, 두 번은 죽은 후 시체해부, 세 번은 화장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한센병이 전염된다는 이유로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강제 격리시켰다. 격리된 후 한센인들은 강제노역, 단종수술, 감금, 체벌 등 무차별적으로 인권유린을 당했다. 임신을 한 여자의 경우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총독부사람들이 약을 사용해 아이를 낙태시켰다. 겨우 임신 사실을 숨기고 아이를 낳더라도 전염을 우려해 아이들은 보육소에 맡겨져 부모들과 따로 살아야 했다.
 
강제 생체실험도 시행돼 한센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주사를 맞고 죽으면 해부를 당했다.
 
이와 같은 아픈 역사를 지닌 소록도를 조금이나마 치유하기 위해 교직원 4명, 학생 16명으로 구성된 아라봉사단이 7월 18일부터 사흘간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 김한얼(생물학과 3)씨가 환자에게 음식을 떠 먹이고 있다.
◇소록도의 아침

소록도는 아침을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4시이지만 환자들의 아침준비를 위해 소록도병원의 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가장 바쁠 때인 식사시간, 모든 봉사자들이 환자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 식사 전에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봉사단은 두 명이 조를 이뤄 기저귀를 교체했다. 하지만 봉사단은 요령이 없어 장갑이 기저귀에 붙거나 기저귀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 실수가 잦았다. 서투른 이들의 손길에 환자들은 화를 내기 일쑤였다.
 
소리를 듣고 온 간호사는 “한센병 환자들은 피부와 근육이 약해서 자칫 세게 잡았다가는 피부가 벗겨지거나 뼈가 부러질 수 있다”며 “환자분들마다 체형이 달라 기저귀를 그에 맞춰 주어야 한다”고 봉사자들에게 당부했다.
 
나균이 뼈나 근육에 침투하면 신체의 일부가 괴사해 몸이 변형되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마다 체형이 다르게 나타난다.
 
기저귀를 갈아준 후에는 물을 배급했다. 환자들마다 따뜻한 물, 차가운 물 마시는 게 달랐다. 컵의 손잡이를 잡을 수 없는 환자들은 젖병을 사용했다. 홍희숙(의류학과 교수) 학생부처장은 종이에 환자들의 상태와 필요한 것을 써서 조끼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모든 환자들의 것을 외울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실수를 줄이기 위함이라 했다. 또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식전에 물을 드시기 때문에 시간에 맞추려면 종이에 적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메모를 했다고 말했다.
 
식사 시간에는 환자 한명 한명마다 봉사자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 손이 불편한 환자의 경우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구강형태가 일그러져 온전한 치아가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환자는 죽을 먹었다. 손이 없고 앞을 보지 못하는 환자들은 봉사자들이 음식을 일일이 떠먹여 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나균이 척추에 침투해 허리가 뒤틀려 혼자 앉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침대 등받이에 기댈 수 있게 하거나 뒤틀림이 심할 경우에는 봉사자가 한손으로 환자의 몸을 바치고 다른 손으로는 음식을 떠줘야 했다.
 
김한얼(생물학과 3)씨는 “내가 일상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한 행동들이 다른 어떤 이들에겐 너무나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내가 대신 손과 발이 되어 도와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환자들의 치료가 시작됐다. 간호사들이 피부에 진물이나 피가 나지 않는지 환자 한명 한명씩 살펴보고 아픈 곳이 없는지 물어봤다. 보통은 간호사 혼자 치료를 하거나 필요할 경우 봉사자들이 옆에서 보조를 맞춰주는데 한 할머니는 네 사람이나 동원됐다. 이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피부를 계속 긁어 피부병이 악화돼 독한 약을 처방했다고 했다. 독한 피부약 안에 들어있는 졸린 성분 때문에 할머니는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셨고 간호사들은 옷을 벗기는 데 애를 먹었다. 네 사람이나 동원돼 할머니의 치료를 도왔다. 봉사자들과 힘을 합쳐 옷을 벗긴 후 몸을 보니 얼마나 긁었는지 온몸이 피와 진물로 범벅이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고 나서야 간호사와 봉사자들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병동이 한가로운 오후 시간대에는 봉사자가 환자의 말벗이 되어 무료함을 달래줬다.
홍경미(간호학과 3)씨는 앞을 못 보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성경책을 읽어줬다. 교회의 장로였던 할아버지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성경책을 읽었다. 하지만 한센병이 발병해 시력을 잃은 후에는 더 이상 읽을 수 없다고 했다.
 
홍경미씨는 “눈이 보이지 않아 병실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시는 환자분들이 많다”며 “그런 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서 책을 읽어드렸는데 정말 좋아하셨다”고 기뻐했다.
 
김유나(초등과학교육전공 4)씨는 장갑도 끼지 않고 복도에 나와 앉아 계신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이 왜 이렇게 차냐며 자신의 손이 따뜻하니까 데워드리겠다고 하면서 할머니의 손을 비볐다. 할머니도 그 따뜻한 손이 좋았던 건지 한동안 꼭 잡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매일 아침부터 잠결에 장갑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빳빳한 비닐의 감촉을 느끼셨던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며 “조금이라도 온기를 더 전해주고 싶어서 맨손으로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오후에 날씨가 좋아 간호사가 봉사단에게 환자분들을 데리고 밖으로 산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봤다. 이 말을 들은 환자들이 어서 빨리 자신들의 휠체어를 갖고 오라고 보챘다. 하지만 모두가 산책을 가기에는 인력이 부족해 환자들 중에서 일부만 외출할 수 있었다. 한 할아버지는 자신은 햇빛과 바람이 정말 좋다고 시력을 잃기 전에 본 맑은 하늘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때를 기억하며 햇빛과 바람을 맞으면 정말 자신이 맑은 하늘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 홍경미(간호학과 3)씨가 앞이 안보이는 환자에게 성경책을 읽어주고 있다.
◇마을봉사의 기회

나균이 몸에 많이 침투하지 않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신 분들은 마을에 거주하고 병세가 악화돼 주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분들은 병동에 입원한다.
 
마을봉사는 평일에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말에 봉사를 하는 아라봉사단은 마을봉사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 우연히 마을봉사를 할 기회가 찾아왔다. 아침 봉사를 끝내고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잡초에 범벅이 된 채 경운기에서 내리시더니 봉사단을 다급하게 불렀다. 잡초를 베고 벤 것을 수레에 옮겨야 하는데 자신이 혼자하기에 너무 벅차다는 것이었다. 마침 시간이 좀 남아서 봉사단은 흔쾌히 도와드리러 갔다. 할아버지의 집은 병동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꽤 큰 면적의 마당에 잡초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잡초제거 도구가 하나밖에 없어 한 명은 잡초를 제거하고 봉사단은 베어진 잡초를 맨손으로 잡아 수레에 옮겨 담았다. 잡초의 양이 예상외로 많아 1시간여 도와드렸지만 일을 채 끝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21일 아침 봉사를 끝으로 3박4일 간 아라봉사단의 봉사가 마무리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정이 많이 들었는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한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우리를 위해 힘들게 왔는데 줄 게 커피밖에 없다면서 봉사단에게 커피믹스를 쥐어줬다. 환자들의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아라봉사단은 소록도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김지원(간호학과 2)씨는 “소록도에 있는 분들과 지내면서 외적인 모습을 떠나 내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았다”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봉사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봉사를 하러 갔다가 오히려 치유를 받고 왔다”였다. 비록 과거에 아픈 시절이 있었지만 작은 도움에 고마워하는 한센인들을 보며 자신들도 조그만 것에도 행복을 찾게 됐다고 했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