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는 열흘 전에 좀 덜 가깝게는 삼백 여든 날 전에 수능시험이 끝났다. 4 16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로부터는 이백 스무 이틀이 된다. 작년 수능 수험생 중에 수학이 좀 모자라지만 국어와 영어에서는 만점이 기대되던 고3 친구 한 명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었다. 부모는 수능 시험 며칠 전까지 그 친구가 수능을 내던지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오래 전부터 결심을 굳힌 듯 수능원서를 아예 제출하지도 않았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켜낸 것이다.

나는 그 친구의 대견함을 칭찬하며 부모를 안심시켰었다. 물론 그 친구는 올해도 수능을 치지 않았으며, 부모 곁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 대신 만두집에서 하루 열 시간의 노동으로 홀로서기 훈련을 수행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참담한 가슴을 쓸어내리지도 못했었다. 지시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복종이라는 사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서귀포 사랑모아어린이집 원장님 카톡 프로필 명패에는 여전히 실종자수가 0이 되는 그날까지 라고 적혀있다.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음이다. 4 16을 잊을 수 없어서 4 16의 엄준한 경고를 새겨두고자 나는 카톡 프로필 명패에 한참동안 이런 문구를 올려놓았었다. 청소년 독립선언, 명령불복종 훈련을 지지합니다.

개인이 자신의 소신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행동하지 못한다면, 4 16 세월호 참사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3이면 누구나 수능을 거쳐 대학에 원서를 내야하고, 중3이면 누구나 연합고사에 한번 목숨 걸어야 하는 천편일률의 질서가 숨가쁘게 느껴질 때, 남들보다 1년 혹은 2년 아니 10년 더디더라도 자신의 길을 개척해보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옮겨볼 수 있다면, 4 16 세월호 참사가 드디어 실종자 수 0을 기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대학 2학년 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예-아니오」를 읽었었다. 예 라고 답해야하는 관습을 깨고 아니오 라고 말한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예-아니오」를 떠올리며 제임스 스콧 James C. Scott의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Two Cheers For Anarchism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개인적으로 남문서점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시절 남문사거리 남쪽 언덕올라오는 길가에 있던 그 서점이다. 이름이 남문서점으로 바뀌었을 때는 내가 제주에 없었지만, 남문서점이 남문사거리를 떠나 지금의 중앙여고 앞으로 옮긴 후에는 더 자주 들러보게 되었다. 그 곳에서 며칠 전 이 책을 발견하고 손에 들고 다니면서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야 책장을 다 넘기고서 이 글을 쓴다.

아나키스트를 안 아르케 이스트 라고 분리시켜 읽어보자 an은 부정 접두어이다. arche는 시초 또는 그로 인한 지배구조, 지배의 질서 안에서 평화를 누리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아치형의 대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ist는 무언가에 기능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접미어이다. anarchist는 그런 사람이다. 흔히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로 번역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거슬린다. 제대로 아나키스트를 설명하면, 홀로서기가 훈련된, 홀로서기를 훈련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민주가 바로 아나키스트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주권을 전제한다. 자유로운 주권의 사회적 관계가 민주주의이다. 아나키즘의 전제는 통제받지않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개인의 자유이고, 이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나키스트의 행동원칙이다. 스콧은 이 책을 통해서 바로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나키즘에 대해 어려울지 모른다는 또는 불온할 수도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차가 이미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서 있는상황에서 굳이 횡단 보도까지 돌아가지 않고 시청앞 대로를 가로질러본 경험이 있다면, 주위를 충분히 둘러보고 자신의 판단으로 신호등을 무시한 채 길을 건너 본 경험이 있다면, 부모의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달아 대들면서 중2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다면, 이미 아나키스트이다. 꼭 한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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