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섬으로 가는 길 - 제주대신문, 중국 상해ㆍ남경 취재기

‘평화의 섬으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를 안고 제주대신문 특별취재단은 1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 중국 상해를 시작으로 남경, 무석을 현지 취재했다. 대한민국과 러시아, 인도, 베트남, 라오스, 몽골 등 다양한 국가와 맞대고 있는 중국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겐 낯선 땅이다.
공산주의라는 다른 체제로 인해 알게 모르게 중국에 대한 여러 선입견이 있다. 상해 거리, 남경대학살 기념관, 남경대학, 복단대학 등을 돌아보며 놀라운 경제 성장과 화려한 불빛에 가려진 중국의 또 다른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 화려한 이면에 숨겨진 가슴 아픈 역사를 살펴보며 평화의 의미와 중요성,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 화려한 야경을 뽐내는 상해.

‘가깝고도 먼 나라’. 비단 일본만을 가리키기보단 중국도 우리에겐 그렇지 않을까?  6·25 전쟁에 중국군이 북한군의 우군으로 참전하며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는 정치적 적대관계와 경제적 단절이 계속됐다. 중국을 직접 방문할 수 있게 된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다. 1992년 그 동안 단절돼 왔던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를 맺으면서 교류를 시작, 민간인 방문이 허용됐다. 지금에 이르러선 경제, 외교 등에서 중국은 미국 못지않은 최고의 파트너이다. 하지만 ‘동북공정’과 ‘이어도’ 등 민감한 문제들 또한 양국 간에 산재해 아직까지도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그럼 이제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에 대해 알아보자.

◇화려한 야경의 도시, 상해

‘동쪽의 파리’, ‘동양의 여왕’, ‘마력의 도시’ 등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상해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정치의 중심이라면 상해는 중국 내 4개의 직할시 중 하나로 공업기지이자 항구와 무역, 과학기술, 정보, 금융, 통신 등 중국경제의 중심인 도시다. 또 국제화와 현대화가 이뤄진 중국의 대외개방 창구이며 주요 수출입 국경출입구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도시다.

상해의 발전은 여러모로 외세, 서구 열강의 침탈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전만 해도 상해는 중국의 고도가 가지고 있는 유구한 역사도 없고 지리적 위치도 중국 대륙 끝자락 양쯔강 하구에 붙어 있는 변두리 어촌이었다.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 상해는 난징조약에 따라 대외 무역항 중 하나로 개항됨에 따라 이후 조계지로써 큰 경제 성장을 이뤘다. 개항 후 상해는 극동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로써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이자 국제도시가 됐다.  이런 역사로 인해 현재 상해는 많은 외국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만들어진 유럽식 건물과 수많은 고층건물들, 건물을 치장하는 불빛들로 그 화려함을 뽐내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끄는 관광지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상해 내 빼곡히 들어선 고층건물들과 화려한 야경은 중국의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는 듯 했다. 1월 1일 신년 맞이 행사 중 발생한 압사 사고의 추모를 위해 일부 건물들의 불들이 꺼졌지만 그 화려함은 빛을 잃지 않았다.


▲ 남경대학살 당시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희생된 중국인 수를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남경대학살 기념관

지난 2014년 12월 13일. 제1회 남경대학살 국가추모일이 열렸다. 당과 국가 지도층 등 최고지도층이 모두 참석한 대규모 추모식이었다.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내륙 침공의 서막을 연 남경침공, 거기서 발생한 비인륜적 사건이 바로 남경대학살이다. 6주 동안 30만 여명의 남경 시민과 무장 해제된 중국 군인들이 일본군들의 총칼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칼로 찌르거나 총격, 생매장, 화형, 집단 강간뿐만 아니라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살인 시합 등 일본군들의 끔찍한 폭력 아래 평화와 번영의 도시였던 남경은 음산하고 피로 얼룩진 지옥의 풍경으로 변했다. 홀로코스트의 주역 나치조차도 이 도시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역겨워한 나머지 남경대학살을 ‘야수의 행위’라 했다. 남경성공회의 존 마기 목사는 남경대학살을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연옥이 남경시가 함락당한 그 날의 모습이며, 침략자 일본군은 피에 굶주린 지옥의 아수라 떼였다‘고 증언했다. 그때의 그 참혹한 역사를 낱낱이 기록하고 보존된 곳이 바로 남경대학살 기념관이다.

▲ 남경대학살 당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고 강가에 방치된 시신들.
2007년 12월 남경대학살 70주년을 맞이해 7만여평 규모의 남경대학살기념관을 확대 개관, 기념관 주변에 평화공원을 조성했다. 기념관은 일본군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로와 동시에 일본군의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건립됐다. 이런 기념관은 역사적 참상의 위에 설립돼 그 어떤 곳보다도 사실적 모습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기념관은 내부 전시관과 외부조형물, 위령제단, 희생자표석 등 전체적으로 제주 4·3평화공원과 유사한 구조였다. 기념관 외부 곳곳에 설치된 고통에 몸부리 치고 울부짖는 동상들 또한 그 날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면서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와 포격 소리가 반겼고 절로 긴장감과 숙연함을 불러일으켰다. 대학살의 발단과 경위 등을 그 당시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함께 상세히 설명했다. 사건의 전개를 보며 남경의 현대사에 다가설 수 있었고 직접 학살 현장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희생자들의 아픔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전시관 끝에서 들린 낯선 소리에 발걸음이 이끌렸다. 어두운 공간 속 물방울이 12초 마다 1방울 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는 대학살 당시 12초 마다 1명씩 사람들이 희생됐던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학살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남경대학살은 역사적 허구이며 과장됐다’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있다. 남경대학살을 ‘대학살’이 아닌 ‘사건’이라 부르며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거나 일부 극우파에서는 ‘환상설’을 주장하며 ‘대학살은 중국인들이 조작한 일’이라며 ‘남경대학살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사실을 날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대학살에 대한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사건을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다. 잘못된 과거와 그에 대한 침묵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정부, 민간, 학계 등을 통해 계속해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남경대학살이 주는 메시지
 
남경대학살은 어찌 보면 우리 제주가 지닌 슬픔인 4ㆍ3과 많은 비슷한 점이 있다. 학살을 단행한 대상은 다르지만 군에서 자행한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점과 엄청난 피해규모,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역사적 관심의 차이가 컸다. 남경대학살 기념관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역사적 관심은 그 어느 곳보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제주 4ㆍ3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4ㆍ3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지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여러 면에서 아직까지 부족한 점들을 느낄 수 있었고 제주 4ㆍ3에 대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됐다. 제주 4ㆍ3의 진실규명 운동은 물론 세계적 모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만 급급해 그 이후 4ㆍ3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남경대학살 사례는 우리 제주가 새로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제주 4ㆍ3에 대한 재조명이 시급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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