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통지기 〈2〉 서영표 사회학과 교수

▲ 서영표 사회학과 교수
◇포퓰리즘의 정의는 무엇인가?
 
포퓰리즘 말 그 자체로 하면 ‘populis’, 즉 ‘people’이다. 이를 민중 또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포퓰리즘이란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원리입니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20세기 선거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대중을 동원하는 부정적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대중의 정의는 무엇인가?
 
대중의 영어적 표현은 매스(mass)이고매스는 초기에는 경멸적인 말이었습니다. 서유럽 중세시대 지배층의 입장에서 봤을 때, 또는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농민들은 흩어져 있으면 평범한 개별적인 농민이지만, 이들이 저항하거나 반항하기 위해 뭉치면 폭도로 인식했습니다.  이들을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대중 또는 매스였던 것이죠.
 
산업혁명 이후의 매스는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신흥부르주아, 자본가들이나 또는 귀족들에게 노동계급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직화돼있고, 지식수준도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분석한 영국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저작 〈The Long Revolution〉에서는 대중이 단순히 경멸적인 대상에서 정치적 주체가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매스라고 표현됐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되는 과정으로 들어납니다.
 
단순화하자면 과거에 매스와 피플은 다른 표현이었지만 근대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는 매스가 곧 피플이 된 것이죠.

◇민중이 본격적으로 다뤄진 시기는 언제인가?
 
민중이 사회과학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16세기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개인이고, 어떤 정치적 시스템을 바꿀 때 군주가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군주는 개인이기 때문에 변덕스럽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안정적인 정치적 권력은 피플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식의 근대의 정치적 개념에서 피플이 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 단계에서 대중내지 피플을 정치적 주체로 이야기할 이유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중이 정치적 주체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다뤄졌다는 말씀이시죠?〉 네. 단순히 통치의 대상이 신민들이었을 뿐이죠. 결론적으로 보통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치가 등장하면서 민중이 본격적으로 정치 주체로 등장합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포퓰리즘은 어떤 사례가 있나?
 
누군가에 대한 원한내지 적대감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파시즘과 나치즘이 있습니다. 또 남미의 포퓰리즘은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된 대중추수주의 인기영합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치인 개인을 상품화시키는 정치가적 포퓰리즘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전직 수상이죠. 이미지 메이킹으로 인기있는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 공약만 남발하는 잘못된 포퓰리즘의 사례
◇많은 한국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은 본래 부정적인 개념이었나?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근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된 의미의 포퓰리즘이 파시즘이라던지 남미의 대중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든지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측면이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
 
한국같은 경우에 부정적으로 쓰여지는 이유가 대중인기영합주의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두 거대 정당인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뚜렷한 이념적 정책적 차이가 없는 정치적 상황에서 선거중심의 정치를 하다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도 못할 정책과 공약을 쏟아내고 상대가 그런 행동을 하면 포퓰리스트다라고 비난하죠.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부정적 의미의 포퓰리즘을 넘어 민중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대중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것이 인기영합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포퓰리즘적 요소와 민중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급진화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뭐가 필요한지 뭘 원하는지 공론의 장에서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충돌하는 의견을 모두 듣고 서로 설득하고 합의하고, 충돌하는 지점에서 해소를하고, 해소가 안되는 지점에서 정치인들이 중재를 하거나, 그런 과정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대중들이 참여하는 진정한 민중 민주주의로써의 포퓰리즘이 실현되는 겁니다. 근데 오늘날의 포퓰리즘은 그런게 아니라 공약만 남발하는 상황입니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개인은 도덕적이지만 모이면 비도덕적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개인은 아주 낮은 지성을 가지고 있는데 집합이 되면 높은 수준의 지성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이분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대중은 부정적 존재인가, 긍정적 존재인가?
 
두 주장 모두 너무 단정적입니다. 얘기를 하자면 전자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합리적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개별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편리하고 합리적인 것 중 하나는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차를 가지게 되니까 교통 체증에 온실 가스 배출에 교통사고로 인명피해 증가, 대기 오염에 소음공해에, 이에 파생되는 질병들이 발생합니다. 개인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사회 전체로는 합리적인 개인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라인홀트는 대중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20세기 중반을 살았고 파시즘을 목격했다면 충분히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가 볼 때에 개개인을 만났을땐 굉장히 도덕적인데 그 사람들이 나치에 동조를 하고 학살을 하고 유태인들을 가둬서 학살을하는 그 모습을 보면 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건 결코 일반화 될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주장일뿐입니다.
 
후자의 경우 지나치게 낙관적인거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부딧히는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주장하고 인정하고 설득하고, 합의에 이르고, 또 그 합의가 다시  깨지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는 실천, 수행을 통해서 구성되어지는 것으로서의 다중 또는 민중이라는 것이지, 민중은 그 자체로 선엄적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대중에 대한 현상을 모두 포퓰리즘으로 인식하는 것은 타당한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포퓰리즘은 저항 행위자체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정치적 토대로서의 대중의 정서와 행위를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저항은 사회운동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사회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정치적 시스템, 이데올로기적 구조 안에서는 해결이 안 되는 소통이 막혀있는, 즉, 자신의 의사를 공식화된 통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주제를 가지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자기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정치적 시스템이 수용할 수 도 있지만 이게 좀 더 큰 시위로 발전하는 경우는 의사표현을 했는데 소통이 안됐을 때입니다.
 
기본적인 권리가 위배되지만 법의 절차라든지. 권력이라든지 행정적 절차 등지에서는 보장이 안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보편적인 이념, 민주주의, 정의, 인권의 개념에 기대서 요구할 수 있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불순한 세력이 개입돼서 했다고 주장한다든지하면 대중의 시위는 커지고 강도는 쎄집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포퓰리즘=선동’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광우병 시위부터 세월호 집회까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선동하는 것이고 전형적인 포퓰리즘”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 행위들이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게 당연 한게 아닌가요? 정치적 목적은 기존의 제도 정치 안에서 반영이 되지 않아 그러면 나의 목소리를 외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인 동시에 생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그러는 것 같다〉
 
정치적이라 하면 엘리트 민주주의에서 정치라는 것은 의회에서 하는 거야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입니다. 그것을 가두려고 하는 자들은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자들이지요.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계속 말하지만 소란스러워야 합니다.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 말하려고 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 입니다. 심지어 지금 기자가 나를 인터뷰하는 이 행위도 정치적인 것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치적이지 않다고 중립적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정치적 색을 띄지 말고 중립적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겁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유리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활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 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있으면 정치적 관계고, 사장과 노동자의 관계도 정치적 관계입니다. 갈등이 있는데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가요. 〈예를 들면, 세월호 가족들도 “절대 정치적이 아니다, 단지 진상규명을 바란다”라고 했는데 교수님 말씀은 그것도 정치적이라는 말씀인건가요〉
 
세월호 가족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존 상황에서 이게 소위 말하는 ‘담론적 실천’이라는 겁니다. 이미 상황은 벌어져 있는데 유가족들이 “우린 정치적이고 정치적으로 주장해”라고 말하면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전달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린 비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정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든 것은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세월호 유가족이 “우린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대중의 힘은 ‘방전’이라는 내부의 어떤 사건에 의해 결집되고 그 후 강력한 단결력을 보인다는 동시에 이 또한 모순이라고 한다. 그들은 결국엔 직장으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집회 당시에도 시위하는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해산 명령도중에 “여러분 모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대중의 힘은 지속가능할 수 없는 일시적인 것인가?
 
일상을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사냐면 “대한민국은 평등하다 민주주의 국가이고 모두가 인권을 보장받고 재벌과 나는 법 앞에서 평등하고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뭔가 할 수 있어” 이것이 보편적이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매일매일 일상을 살잖아요, 사람들은 일상을 살면서 사소한 계기일 수도 있고 집합적인 개기일 수도 있고 공통의 개기를 통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요. 이것을 ‘탈구(脫臼, dislocation)’라고합니다.
 
문제는 뭐냐면, 짧은 시기 내에 개인적으로 느끼게 되는 “내가 바보처럼 살았구나, 세상은 평등하지 않는데 왜 평등하다고 생각했나?”와 같은‘탈구’가 오랜 기간 유지되면 소위 ‘루저’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런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아무리 뛰어도 앞으로 못간다는걸 깨닫고 멈춰서면 어떻게 돼죠? <넘어지겠죠?> 그게 두려운거에요. 그리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끊임없이 평등하다고 말하면서도 “너는 개인이야”라고 부르거든요. ‘옆에 있는 사람은 다 경쟁자야’라고 인식합니다. 나는 좌절을 겪고 탈구를 경험하고 있는데 옆에 사람은 계속 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만 멈춰서면 다 바보가 될거야’ 생각하고 다시 런닝머신 위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특정한 계기가 만들어지면 옆 사람을 확인합니다. “너도? 너도 우리가 속고 있다는걸 느꼈어?”, “너도?” 라고 하는 순간 집합적 행위로 가는 거죠. 그런 행위가 얼마나 자주 만들어 지고 지속될 수 있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는 대중들의 공감의 행위를 찾아내고 지속시키는 정치를 시도하는 정치집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제도화된 사회에서 그 사회를 벗어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런닝머신을 계속 뛰면서 간극이 쌓이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불만이 쌓입니다. 그것이 파시즘적으로 발산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간베스트(일베)’입니다.
 
우리 모두가 간극을 동시에 느끼면서 간극을 좁히는 정치를 할 수 있느냐 이것이 사회 진보이자 민주주의입니다. 그런 정치가 없는 이상 한국 사회 대중의 힘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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