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중연 소설가

올해 응모작품을 읽으면서 대체로 든 생각은, ‘제주도 대학생들 중에 육지로 나가 살고 싶어하는 친구가 많구나’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것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대처로 나가 해낙낙 청춘의 광휘를 누려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또한 질주의 빠른 속도에 몸을 맡기거나 전국에서 몰려든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과 긴 칼 빼들고 진검승부를 벌여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잠재돼 있을 것이다.
 
소설도 그렇다. 심하게 말하면 소설 역시 신분세탁을 완벽하게 마치고 중앙의 누군가에게 간택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면 3~4월 녹담만설(鹿潭晩雪)의 포근함과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 저 오름에 장대한 서사처럼 피어나는 수목들의 향연, 그리고 초겨울의 신새벽 밀감밭에 숨죽여 내려앉는 정결한 숫눈송이가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척박한 땅 다독여 밭농사를 짓고 끊어질 듯 조마조마한 숨비소리를 뱉어내는 허리 굽은 어머니, 그리고 거친 바다와 싸워 바다를 기름진 밭으로 일궈내는 저 억센 등의 아버지. 그들의 한숨과 억척스러움, 그리고 고단함을 들여다볼 시간이나 안목이 있겠는가. 단언컨대, 중앙적인 것이 세계적인 게 아니라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응모한 작품 중에서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바다로 간 문명인〉과 〈초록고래〉였다.
 
〈바다로 간 문명인〉은 단연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응모자는 원양어선 체험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야기가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재미있는 소재와 실감나는 디테일에도 응모자는 단지 이야기만을 위해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에도 이와 비슷한 유의 작품이 눈에 띄었는데 똑같은 얘기를 해주고 싶다. 스토리텔링적인 요소에만 집중하다 보면 문학적인 완성도를 간과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뛰어난 이야기꾼의 재능을 지녔다 해도 일정의 문학적인 호흡과 문장 완성도를 갖추지 않으면 꽤 오랜 기간 고단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록고래〉는 번역투의 문장과 군더더기가 뒤섞인 문장, 그리고 자기중심적이고 방어적인 서술들이 특히 눈에 거슬렸다. 아무래도 좋은 작품들을 필사하거나 다양한 독서를 통해 어휘력을 길러 자기만의 문장을 구축하는 과정이 절실해 보인다. 특히 일어ㆍ영어 번역투의 구어체 문체가 입에 붙은 것으로 보아, 이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문장의 호흡을 바꾸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반면 장점도 많다. 예를 들어 “촌스럽다고 투덜거렸던 청 테이프 색의 방수페인트 옥상”이나 “지평선을 만든 마늘밭이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색의 파도가 생겨났다” 등의 표현은 경험의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탁월하다. 또한 삶에 대한 성찰이 눈부시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다.
 
“공부만 하면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경멸하던 텐프로조차 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생은 뻔하게 흘러갔고, 나는 그러한 인물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나는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 없었다.”
 
〈초록고래〉는 거칠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장소설의 완성미를 갖추고 있다. 살면서 우리는 어쩌면 아니, 필연적으로 혼자만의 바다에 스스로를 유폐하거나 강제로 격리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그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여 짓씹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하마 그 순간 초록고래와 맞닥뜨릴 수도 있으리라. ‘터닝 포인트’라는 절대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과 홀로 대면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발칙하고 솔직하며 심지어 요망지기까지 한 응모자에게 당선의 영광을, 낙선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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