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이루기 위한 명확한 목표설정과 노력없이는 한낱 백일몽일뿐…

젊은이는 미래에 무엇인가 되어야할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그들에게 장래의 희망에 대해 묻곤한다. 나도 가끔 학생 상담에 임하면서 학생의 장래 희망을 묻기도 하는데, 학생들의 희망을 듣고 난 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는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대부분의 학생들은 묵묵부답이나 머리를 긁적거림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한 학생이 상담 중에 자기는 올해 내로 HSK7급 이상을 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올해 구체적으로 언제 시험이 있는지, 시험 장소는 어딘지, 1차시험에 실패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을 묻고 대답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학생들이 말한 이런 종류의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허망한 白日夢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운동장에서 높이뛰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운동능력과 상관없이 높이 뛰어오르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내 체육관에서 농구 골포스트를 잡기 위해 뛰어 오른다면 훨씬 높이 뛰어 오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연암짐〉 ‘형언도필첩서’에 다음과 같은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최흥국은 나라를 통틀어 글씨를 잘 쓰는 자였다. 일찍이 과거에 나아가 답안을 쓰다 한 글자를 얻었는데, 황희지의 글씨와 비슷하였다. 앉아서 종일 살펴보다가 차마 버릴 수 없어 답안지를 품고 집에 돌아와 버렸으니, 이는 마음속에 득실을 두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징은 어린 시절 루대에 올라 그림을 연습하고 있었다.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 삼일이 지나서야 찾았는데, 그 부친이 노하여 매질을 하니 울면서도 그 눈물로 새를 그렸다 한다. 이는 그림에서 영욕을 잊었다고 이를 만하다. 최산수는 노래를 잘하는 자였다. 산속으로 들어가 매번 한 가락을 마치면 모래를 주워 나막신에 넣어, 그 모래가 나막신에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그를 죽이려 하니, 바람에 의지해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들이 감격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이는 생사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연암 선생은 이 글에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 무엇을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정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조차도 걸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 이인편에 “朝聞道(조문도), 夕死可矣(석가사의)”라는 문장이 있다. “아침에 도를 깨달았으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글귀이다. 공자는 도대체 얼마나 그 道를 깨닫고 싶었길래, 어느 순간 그 道를 깨달았다면 그날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고 했을까? 희망이란 이런 것이다. 명확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 심지어 목숨조차도 걸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그 방안에 대해 생각중이라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白日夢을 꾸고 있을 따름이다.
 
희망의 완성은  목표 설정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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