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력도 없이 자아를 소유하려는 것,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아닐까?

플라톤의 〈국가론〉, 제2권에는 ‘기게스의 반지’라는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리디아의 왕에게 고용된 기게스족의 한 착한 목자가 지진으로 갈라진 땅 속에서 이상한 금반지를 줍는다.  그는 금반지의 받침대를 자기 쪽으로 돌리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 힘을 이용해 자신이 사랑한 왕비와 간통을 하고, 왕을 살해한 후 자신이 왕이 된다. 플라톤은 이 일화를 통해 ‘반지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는 그가 아무리 선한 자라도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며 ‘절대 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루이 라벨 역시 〈나르시스의 오류〉에서 ‘기게스의 반지’에 대한 일화를 언급한다. 하지만 라벨은 이 동일한 일화를 통해서 플라톤과는 다른 차원의 삶에 대한 해석을 한다. 라벨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만일 사람들이 이런 반지를 실제로 가질 수가 있다고 한다면 너도 나도 이를 가지고자 원할 것이라는데 주안점을 둔다. 반지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힘’은 아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사태들을 낳을 것이고, 이는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매번 원할 때마다 기적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라벨은 이런 기적을 바란 것이 나르시스가 범한 오류 중 하나라고 해석한다.
 
인간 의식의 고유성, 그것은 누구나가 ‘자기-자신(자아)’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자아는 ‘내가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나(내적인 존재)’와 ‘밖으로 드러나는 나(외적인 존재)’ 사이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그런 ‘나’이다. 라벨은 이를 존재론적인 ‘성실함’이라고 말한다. 이 간격을 매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노력과 삶 안에서 책임성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 것으로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손쉬운 기적을 원했다. 원할 때는 언제나 연못으로 달려가 자아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기적은 진정한 기적이 아니다. 진정한 기적이 되려면 연못 속에 비친 이미지가 실재가 돼야만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나르시스가 범하는 오류는 두 가지인데, 그것은 사실 현대인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다. 하나는 결실을 위한 과정의 생략이다. 농부들이 한 줌의 쌀을 얻기 위해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과정과 인고의 땀을 흘려야 하듯  자아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과정의 노력과 수고를 감수해야 된다. 하지만 속도에 쫒기는 현대인들은 너무나 쉽게 연못 속에 비친 이미지로서 ‘진정한 자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둘째는 더 이상 ‘진정으로 내가 되고자 원하는 나’와 ‘세상에 드러난 나’ 사이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보다 큰 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나의 어떤 결함이나 오점, 그 무엇도 숨겨줄 기게스의 반지를 가진 사람은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을 ‘의인이나 영웅’과 같은 사람으로 둔갑시킬 힘마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연못 속에 비친 이미지에 불과하다. 세상 모든 사람을 숨길 수 있어도 결코 자기 자신은 숨길 수 없다. 
 
내가 원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려는 노력보단 외적으로 비치는 이미지를 통해 너무나 손쉽게 ‘자아’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현대인의 비극의 출발점인 것 같다. 오늘날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행한 한국사회의 모든 불행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 과장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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