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처음 이 시를 읽고 메모해 뒀던 구절이다. 사랑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다소 자극적인 서두지만 그만큼 시의 마지막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시에서 ‘물’은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다. ‘물’의 속성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다. 화자는 ‘낮은 곳’에 있고 싶다고 고백한다. 다짜고짜 낮은 곳에 있고 싶다니 도저히 시를 이어서 읽어 내려가기 전까지는 사랑에 대한 시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흔히 ‘낮은 곳’이라 하면 안도현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안도현의 시에서 가장 낮은 곳은 사회의 낮은 지위를 가진 가난한 자들이 사는 곳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시에서의 ‘낮은 곳’으로 간다는 행위에는 상대가 자신에게 사랑을 주기를 원하는 갈망의 표현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겠다는 자기희생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낮은 곳으로 가겠다는 화자의 모습에서 상대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보인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꺼이 낮은 곳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겠다’는 화자. 여기서도 상대의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화자의 자기희생의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흠뻑’ 젖을 만큼 사랑을 주고 싶다는 구절에서 열렬히 구애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른 것을 원하지 않고 사랑만을 원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화자는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듯하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너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너를 위해서 희생하겠다.’ ‘나의 존재가 너에게 특별했으면 좋겠다.’ ‘사랑에 죽어도 좋으니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한다.’라는 말을 물의 속성에 빗대어 단호히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물’을 사랑에 빗댄 것으로 말미암아 아마 화자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상황에서 시를 써내려간 것이 아닌지 추측해본다. 사랑에 목이 말라 사랑(물)에 흠뻑 잠겨보고 싶은 화자의 열망을 이 시에 담은 것은 아닐까.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중이거나 짝사랑 중일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까지 사랑(물)에 잠겨 죽더라도 사랑을 갈망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사랑은 곧 희생이고 한 사람 앞에서 나를 내려놓는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울림을 주는 이유는 아직 서투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이라는 감정 하에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가 너무 팍팍해서인지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만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당장 데이트 비용조차 내기 어려워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요즘 현실인데 말이다. 사랑조차 사회적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사회가 안타깝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흠뻑 젖을 수 있는 사랑이 당신에게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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