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이 힘을 가지는 정치 형태고 힘을 표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다수결 원칙’즉 투표이다. ‘다수결 원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수 의견을 존중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의 의견으로 모든 일을 행한 다면 그것은 다수에 의한 폭력이며 다양성이 결여되는 전체주의로 빠진다.

역사에서 돌이켜보면 다수의 의견은 수많은 오류를 범했다. 다수의 독일인들은 지도자로 히틀러를 뽑았고, 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다수에 의한 폭력에 대한 공포가 사회 전반에 퍼져 소수의 다른 의견이 탄압받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침묵했고 동의했다.
 
소수의견이 결핍된 사회를 현대 민주주의 환경에 적용해 보자, 동성애자ㆍ흑인ㆍ빈민ㆍ여성ㆍ노인과 같은 소수 집단은 배척될 수밖에 없다. 이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를 위한 투표는 ‘대단한 성자 납셨네’라고 조롱받는 위선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늘날 올바른 민주주의는 많은 부분 소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그 방법이 ‘대화와 타협’이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는 개념이 ‘숙의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거리로 나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경찰을 때리고 버스를 부시면서 시위를 하는 걸까? 
 
서영표(사회학과) 교수님은 사회 운동은 소통이 막혀있어 자신의 의사를 공식화된 통로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격렬한 시위로 발전하는 경우는 정치적 시스템이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무시했을 경우에 해당된다고 한다(936호, 담론통: 사회통 참조).
 
이 행위는 민주주의에서 당연한 권리이다. 존 롤스는 〈사회정의론〉에서 시민 불복종에 대한 헌법상의 이론이 항의를 규정하고 그것을 민주주의적 권위에 대한 다른 형태의 반대와 구분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시민 불복종의 근거와 정의로운 민주 체제 속에서 그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조건들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박근혜 집권 하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무식한 정권에 침묵하고 공포에 의해 자기 검열하는 사회이다. 사방으로 소통은 막혀 있고 농민ㆍ빈민ㆍ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을 돌아올 수 없는 절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11월25일 광화문 광장에서의 집회는 이대로 멍청히 절벽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거센 몸부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소수는 고통 받고 있다. 백두관 식당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의 처우개선에 대해 학내에서 어떠한 발언권을 갖지 못한다. 총학생회는 학생들에 입맛에 맞는 일만 하면 그만이고, 교직원들은 애써 자기 밥그릇을 그들에게 나눠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라고 협동조합 제도가 있지만 이사회나 대의원 중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다수결의 원칙에는 절대 위반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라고는 절대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시위를 할 여력도 없다. 다수가 굴러가는 방향으로 힘없이 이끌려 갈 수밖에 없고 아주머니들의 침묵에 대해 다수는 정의롭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이를 방조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절벽 끝으로 끌려가고 있을 때는 절대 도움의 손을 요청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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