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동화

이연희(국어국문학과 3) 

얘―. 문득, 머릿속으로 어떤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얘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말 그대로 문득,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푸른색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모든 게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목이 아프고 손이 저렸다. 엉덩이도 허리도 아팠다. 나는 내가 내내 고개를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딱한 바닥에서 고집스럽게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있다는 것도. “괜찮니, 얘야?”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였다.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내리자 눈길이 가는 곳마다 색색으로 빛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얼마나 앉아있던 건지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을 넘어진 후에야 제대로 설 수 있었다. 딛고 서 있는 땅이 검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여기란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에는 가로수들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었다. 고요한 풍경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바람도 없이 모든 게 멈춰있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거리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그래, 여기야.”

가로수 중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렸다. 다른 가로수들보다 키가 컸고, 유독 하늘을 향해 가지가 뻗어 있었다. 잔가지들이 억지로 쳐내진 다른 나무들과 달리 그 나무만은 가지 끝이 온전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나뭇잎이 더욱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여전히 바람은 불고 있지 않았다. “안녕?” “어... 안녕하세요?” 가까이서 본 나무는 더욱 거대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가 한참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도블록 위에 난 좁은 흙바닥을 가득 채워 마치 아스팔트와 블록과 한 몸으로 자라난 것 같았다. 아름다운 나무였다. 내 감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가는 가지들과 나뭇잎이 잘게 떨렸다. 웃어서 몸이 떨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뭘 보고 있었니?”

나무가 건넨 질문에 내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했다. 눈을 가득 채우던 파란 하늘. 하지만 하늘을 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작고, 둥그렇고, 보다 더 빛나는 것. 대답하기 전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을 보고 있었어요. 달은 어디 있나요?” “달은 밤에 뜨지. 지금은 낮이라서 보이지 않아.” 그 말을 듣고서야 달이 새까만 하늘에서 빛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렇게 당연한 일을 잊고 있었다니. 머리가 조금 멍했다. “아, 그래요. 달은 밤에 떠요.” 나무는 나뭇잎을 흔들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무님은 무얼 보고 있었나요?” “나는 너를 보고 있었단다.” “저를요?” “그래, 오랫동안 보고 있었어.”

나무가 더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더는 말이 없었다. 왜인지 내 앞에 선 나무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이라면 얼마만큼의 시간을 말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지켜보았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달이 밤에 뜬다는 것을 떠올릴 때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꼭 방금에야 태어난 것 같았다.

푸른색이 내 눈앞을 채웠을 때, 모든 게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그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그 전에도 내가 존재했다는 걸 분명히 아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렴풋한 달. 그 흐릿한 이미지가 더 답답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괜찮니?” “이상해요. 저는 왜 여기에 있나요?” 한 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자 모든 게 이상해보였다.

왜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까 왜 혼자 앉아 있던 걸까 나무는 어떻게 나를 아는 걸까 왜 많은 나무 중에 이 나무만이 나에게 말을 걸었을까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끝도 없이 생겨나는 질문들을 눌러 삼켰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나를 잠식했다. 불안감과 함께 세상의 색들이 구불구불 섞이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물에 초록색, 하늘색, 노란색 등 여러 색의 물감을 한꺼번에 떨어뜨려놓은 것 같았다. 눈앞이 물감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쉬이, 괜찮아.” 무언가 머리를 톡 건드렸다. 순간적으로 원래대로 돌아온 시야에 비틀거리자 튼튼한 나무 기둥이 내 몸을 받쳐주었다. “기억하지 못하는가 보구나. 괜찮단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거든.”

따뜻한 손이 등을 계속해서 부드럽게 쓸었다. 물론 나무는 손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느끼며 물었다. “무엇을요?” “자기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말이야.” 사고. 손끝, 발끝부터 서서히 몸이 싸늘해졌다. 온몸을 돌던 피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당연히 뛰고 있다고 생각했던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제가, 죽었나요?” “나는 네가 자동차라는 것에 치이는 모습을 본 것뿐이란다.” “그럼 죽지 않은 거예요?” “나는 알 수 없어.”

죽은 것도 아니고 죽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대체 무엇일까. 나무의 대답은 들으면 들을수록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바로 서서 가만히 손을 올려놓은 심장 부근은 너무도 차가웠다. 가슴께를 아무리 더듬거려도, 꾹 눌러보아도, 가슴 안쪽은 텅 비어버린 것 마냥 고요했다. “저는 무엇인가요?” “나는 너와 비슷한 존재들을 많이 보았어. 대부분 한 가지만을 쫓고 있었지. 너처럼 다른 건 기억하지 못했단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인가요?” “그랬을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나무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어떤 이들은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더구나.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계속 한 가지만 쫓았고, 또 어떤 이들은 어느 날엔가 모습을 감추고 영영 볼 수 없었어.” 나무가 이제껏 한 말 중 가장 길었다. 그리고 그만큼 어려웠다.  “저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글쎄.”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잘랐지만 왜인지 나무가 그 대답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묻고 싶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건 어떤 느낌인지, 다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큰 감흥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는 누구인가요?” “그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니?”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걸요.” “그렇다면 그건 네가 알아내야 할 문제란다.” 나무는 나뭇잎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번에는 나무의 말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몇 살이나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있는지 또 친구는 있는지는 물론, 하늘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바람도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조금은 노란 빛을 띠는 둥그스름한 달이었다. 꼭 머릿속이 까만 종이 한 장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는 하얀 물감을 찍은 붓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동그라미 말고는 온통 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제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내죠?” “이름이 곧 너는 아니란다. 이름은 말 그대로 그저 너를 이르는 말일 뿐이야.” “그럼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하지. 다만 다른 사람이 너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네가 너를 부르는 이름이 중요한 거야. 그건 정말 네 자신을 나타내거든.” “나무님도 이름이 있나요?” “지금 부르고 있잖니.” 나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하지만 그건 나무님의 이름이 아니잖아요.” “그래. 그건 사람들이 우리에게 붙인 이름이지. 하지만 모두 그렇게 부른단다.” “그럼 나무님은 이름이 없나요?” “나는 나를 ‘하늘’이라고 부르지. 하늘을 좋아하거든.” “하늘이요?”

유독 하늘을 향해 뻗어있던 가지가 떠올랐다. 하늘을 좋아해서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가고 있는 거구나.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유독 아름다운 건 그래서일까. 자라난 나뭇잎을 따라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느다란 가지는 점점 자라고 있었다.

가지 끝에는 밤이 오기 전, 서서히 옅어져가는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달. “달이 있어요…” “낮달이구나.” 희미한 하늘색과 희미한 달은 잘 어울렸다. 하지만 내가 찾는 달은 아니었다. 이대로 해가 지고 밤이 오고 달이 선명해져도, 내가 보고 싶은 달은 아닐 것 같았다. “제 이름은 달이라고 하고 싶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리는 순간에 유일하게 붙잡은 것이 달이었다. 나는 달을 얼마나 좋아했던 걸까.

달이 보고 싶었다. 기억 속의 그 달을 찾아내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나무, 아니 하늘이 말했다. “이름을 짓는 걸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얘야.” 나는 그 말에 그저 웃어보였다. 지금의 나에게 달은 전부였다. 달이 아닌 다른 이름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달을 찾으러 갈래요. 그리고 제가 누군지 기억해낼 거예요.” “그래. 너도 떠나는구나.” 하늘이 작별인사를 하듯 잎을 흔들었다. 나뭇잎끼리 서로 부딪쳐 기분 좋은 바람 소리가 났다. 나는 나무기둥을 한 번 꼭 끌어안았다. “조심하렴. 네가 바라는 걸 찾길 빌게.” “고마워요, 하늘님.” 흔들리는 나뭇잎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짙어져가는 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이 떠나왔지만 막상 걷다보니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다. 이곳도 저곳도 모두 낯설었다. 표지판의 글씨만 다를 뿐 모두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갈림길이 많아 나올 때마다 수도 없이 고민해야 했다.

골목으로 통하는 샛길이 보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도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은 벌써 어두워졌다. 기억나는 것은 달. 그리고 희미한 기억에서도 특히 어렴풋하게 주변을 감싸던 나무와 주홍빛 불을 밝히던 가로등, 나무로 만든 벤치. 벤치에 앉아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주변의 풍경이 기억이 날듯 하면서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더 기억난다면 좋을 텐데. 살아있는 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헤매기만 해서인지 힘이 들었다.

얼마나 걸어왔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온 것 같았다. 너무 지쳐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 이렇게 힘든데 달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누군지는 기억해낼 수 있을까….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시끄러운 소리가 정신을 번쩍 깨웠다. 반사적으로 치켜든 눈앞으로 커다란 것이 쌩 하고 지나갔다. 버스였다. 텅 빈 도로 위로 버스 하나만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버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서가는 버스 안에 내가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버스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버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리면 잠시 후에 뒤에서 다시 버스가 지나가고는 했다. 다른 자동차는 없었다. 오로지 그 버스만이 같은 길로 같은 속도로 달려갔다. 그렇게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자 버스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곳은 건물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건물마다, 그리고 건물의 층층마다 무엇을 파는지도 모를 가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어느 새 날이 다시 저물어가고 있어서, 가게 창문이 하나 둘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저절로 불이 켜지는 모습이 기괴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어두워져도 가로등 하나 켜지지 않았는데.

내가 살아있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옆에 있던 가게에도 불이 들어왔다. 어쩐지 목 뒤가 서늘했다. 불이 켜져 가는 가게 쪽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애써 붙잡아 내렸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이렇게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걸까.

큰길가에서 상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길이 복잡해졌다. 한참을 헤매다가 도로 반대편으로 가보아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오른쪽으로 난 길 저편에 모여 서 있는 나무와 벤치가 보였다. 공원은 아니었지만 잠시 앉아 쉬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무와 벤치와 가로등. 저곳이 틀림없었다. 단번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지쳐가던 몸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길목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벤치들. 대여섯 개는 되는 듯한 벤치들 중, 끝에 있는 딱 하나의 벤치만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이곳까지 달려온 것과는 다르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뛰지도 않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혹시 무언가 잘못될까봐 달이 있는 하늘에는 시선도 주지 못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곳이 가까워졌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른 곳과 똑같이 평범한 벤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꼭 이곳이어야 했다. 세찬 심장박동 소리가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까딱하면 벤치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주 살짝 엉덩이 끝만 대고 걸터앉았다. 슬쩍 고개를 들자 까만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달이 있었다. 기억과는 달리 선명한 달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달…” 하얗게 빛나는 달은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싶어 고개를 드는데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옆자리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동그란 달이 눈꺼풀 안으로 담겼다.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여전히 희미한 그곳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달을 보고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옷깃으로 파고들었지만 추운 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 하얀 달빛이 가로등의 주홍빛과 섞여 내렸다. 나와 그 사람이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평범한 집들 사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인기척은 사라졌다. 달은 그때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 내 기억은 그 사람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 사람은 누굴까? 떠올린 기억을 다시 되짚어보아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몇 가지 뚜렷한 감각이 추가되었다는 것 빼고는 여전히 기억은 흐릿했다. 분명 알고 있는데 기억나지 않는 답답한 느낌에 다시 속이 메스꺼워졌지만 숨을 푹 내쉬며 흘려버렸다.

새로 떠올린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따라가고, 또 다른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게 선명해질 것이었다. 기억을 좀 더 느끼며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을 찾아올 때와는 달리 골목길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얼핏 본 골목길의 분위기는 이곳과 비슷했다.

얼마 걷지 않아 기억과 아주 비슷한 거리에 들어섰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속의 길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차 하나만이 겨우 지나갈 좁은 길에는 꽃이 아무렇게나 자란 화분이 놓여있기도 하고, 가죽이 다 헤진 낡은 소파가 놓여있기도 했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집 안에서는 드문드문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잃은 후로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낯선 집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왜 이 길을 걷고 있었을까, 생각하며. 어쩌면 집이 이 근처인지도 모른다.

들려오는 목소리 중에 엄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가 섞여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당장 아무 집 안으로나 뛰어들고 싶었다. 도란거리는 목소리에 나도 끼고 싶었다. 누군가 그리웠지만 어떤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완전히 혼자였다. 괜히 대화가 들려오는 집의 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 억지로 눈을 돌렸다. 홀로 빛나던 달의 앞으로 엷은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느릿한 구름의 움직임과 함께 천천히, 작고 느린 내 발자국 소리에 조금 더 큰 발자국 소리가 겹쳐졌다. 이제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그저 기억의 잔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만 하지 못할 뿐,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중에 밤바다 보러 가자.” 갑자기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와 아주 비슷했다. 깜짝 놀라서 자리에 우뚝 서자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좀 더 낮고,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바다?” “응. 밤바다 보고 싶어.” “그래, 좋아. 가자.”

눈앞에서 검은 바닷물이 굳어진 한 몸처럼 출렁거렸다. 바다냄새가 났다. 검은 바닷물과 하늘이 동시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 수평선이 유난히 짙었다. 허공에서 어둠에 모습을 감춘 등대가 한줄기 빛만을 뿜어냈다. 그 옆으로 펼쳐지는 크고 작은 불빛들. 오른손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내 체온보다 훨씬 따뜻한 손이었다.

밤바다는 아름다웠다. “저번에 갔던 곳으로 가자.” 다시 내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가 좋았어?” “응. 너무 예뻤어.” 다시 골목길로 돌아왔다. 우뚝 선 자리에서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어둠 속에서 방금 본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하게 데워지던 손은 다시 차가워졌다. 어색하고 허전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또 그 사람이다. 기억하고 있는 기억, 새로 떠올리는 기억, 모든 기억이 그 사람과 함께였다. 누굴까? 주먹 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아하던 사람일까? 사귀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쑥스러워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어떤 사람이었을까.

유일하게 기억난 사람임에도 아는 것은 목소리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게 될 테다. 바다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서도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그 사람에 대해 궁금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더 까맣게 물들어갔다.

혹시나 다른 기억이 떠오를까 바다로 내려가면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더 이상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지금까지 떠오른 기억만 곱씹으며 혼자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아주 좋았으니 노래를 잘 하지 않을까. 기억을 떠올릴 때 느꼈던 인기척을 생각해보면 나보다 키도 큰 것 같았다….

상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 것이다. 버스 말고는 움직이는 자동차를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가만히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본 게 전부였다. 나를 이끌어주었던 버스가 생각나, 막 커브를 돌며 사라지는 빨간 자동차 꽁무니를 급하게 쫓으려 했다. 그런 내 옆으로 또 다른 자동차가 스쳐지나갔다. 이번에는 하얀 자동차였다. 그리고 또 한 대, 또 한 대. 그 뒤로도 줄줄이 달려왔다. 반대쪽 차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어있던 도로는 색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자동차들로 가득 찼다.

끝도 없이 줄지은, 엄청난 수의 자동차가 거북이처럼 조금조금 나아갔다. 어서 가라는,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어제의 조용한 거리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동차 운전석에도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소음은 점점 더 심해졌다. 저절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아무도 없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들. 뻣뻣하게 굳어진 목이 자꾸 돌아가려 했다. 세상이 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계속 되뇌었지만 점점 더 겁이 났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침착하자고 오히려 더 천천히 걸었다.

갑자기 갓길에 세워져 있던 차의 문이 벌컥 열리고는 다시 쾅, 하고 닫혔다.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무서움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무언가가 내렸다. 아니, 탔나? 보이지 않는 벌레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내달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무도 없는 소란스러움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쫓기는 건 아니었지만 온 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죄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사고가 난 것도, 기억을 잃은 것도,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도 나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냥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하늘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많이 보았다고 했다. 나처럼 사고를 당하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늘이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지만 차라리 거짓말을 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도 혼자라는 것이 더 외로웠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달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달을 보던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동시에 나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두는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사람만을 따라가고 있는데,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왜 기억은 흐릿하기만 한 거야.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내게 남아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달과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람과 내가 누구인지가 서로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더 이상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달리기를 멈추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자동차는 없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달려온 것 같은데도 숨 하나 차지 않았다.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흐리게 그려진 유화 속의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때, 고요를 깨고 녹슨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바로 앞 골목에서 난 소리였다. 그곳에서 누군가 나왔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내려고 희미한 기억을 마구 곱씹던 것이 무색하게도,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처음 벤치에 도착했을 때처럼 가슴께가 콩콩 뛰었다. 어렴풋이 느꼈던 것처럼 키가 아주 컸다. 부드러운 곡선을 타는 눈매가 아주 예쁘다. 그는 마중을 나온 듯, 내게로 걸어왔다. 기억 속에서 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가까워지는 속도와는 상관없이, 아주 느리게 들렸다.

영원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다. 이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로 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다. 나를 넘어, 내 뒤의 저 어딘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와 나를 감싸던 순간은 유리조각이 되어 검은 아스팔트 도로로 부서져 내렸다. 원래도 뛰지 않는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

바다가 코앞에 있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폐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다는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수평선이 보이고 그 옆에 우직하게 서 있는 등대가 보였다.

마지막 기억 속의 바다였지만 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대로 나를 스쳐지나갔다. 닿지도 못했다. 내가 그 자리에 없는 듯이, 그가 걸어오던 게 아닌 듯이. 새로운 기억도 없었고, 떠올렸던 기억도 희미한 채로 남아 있었다. 내가 억지로 끼워 넣은 얼굴만이 달라졌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를 잡아보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왜 도망치던 내 앞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그가 있는 곳을 찾아 가게된 건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나는 여전히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왜일까.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사람인데, 내 전부였던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진 만남이었지만 이렇게 허무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이름을 정하는 걸 서두를 필요는 없다던 하늘의 말이 생각났다. 이런 뜻이었을까. 내 이름은 달이 아니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모두 끝났다….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를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바다 깊은 곳으로 잠겨 들어가다가 단번에 수면 밖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머리인지, 시야인지, 어질어질했다. 여자가 보였다. 딱히 나이가 들어보이지도, 그렇다고 어려보이지도 않는 여자였다. 어떤 걱정도 없는 듯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제가, 보여요?” “아주 잘 보여요.” 여자가 목소리만큼 밝게 웃었다.  “저기, 사람이세요?”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심코 질문을 던지고 아차 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비웃지 않고 다정하게 답해주었다. “사람은 맞아요. 그쪽도 사람이에요?” “네. 어, 저기, 살아있지는 않지만요.” “나도 그래요.” 얼떨떨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지만, 모두 다 끝난 후인데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절망이 다시 나를 파고들려 했지만, 여자의 물음이 나를 붙잡았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기억을 따라왔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세상 다 산 얼굴로 앉아 있어요?” 티가 많이 났던 걸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속내를 들켜버렸다. 머쓱하게 얼굴을 매만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여자가 다시 말을 건넸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네, 조금요.” “힘들었겠네요.” 여자가 몸을 움직여 내 옆에 앉았다. “저도 기억을 따라왔어요. 이곳이 마지막이죠.” “마지막이요?”

그녀가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신차려보니 저 어디쯤에 있었어요. 파도도 거의 치지 않는 바닷물에 떠밀려 왔어요.” 무서웠을 텐데도 여자는 담담했다. 나에게는 하늘이 있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혼자서 떠나 다시 혼자서 이곳까지 돌아왔다.

“난 내 발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 거예요. 그거 하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 표정을 알 수 없어서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바다만 바라보았다. 수면이 해가 지면서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그쪽도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왜 자살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수 있는지 화가 났어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되찾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바다로 내몰렸던 순간들. 그녀를 따라 나도 다른 생각에 잠겼다. 내가 떠올릴 것이라고는 달과 기억 속의 그 사람밖에 없었다. 내 전부였던 사람.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는 다 알아요. 멍청한 짓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해는 돼요. 당신은 아직 길이 많이 남아있겠죠?”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대답을 바란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조금 더 겁에 질려 있었지만요. 자신을 찾을 수 없다고 했어요. 찾고 있던 것이 답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영영 자기를 알 수 없을까봐 겁에 질려 있었어요.” 꼭 내 이야기 같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그녀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포기해버렸어요.” 그렇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나도 막 포기하려던 참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포기해버린 것에 대해 비난할 수 없었다. “포기한다는 건, 녹아버리는 거예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녀의 눈이 나를 질책해왔다.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순간, 그 자리에 그냥 녹아들어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거예요. 분명히 있지만 없는 게 되는 거예요. 그럼 정말 끝이 나는 거죠.”

그녀의 눈빛에 숨이 막혔다. 그녀의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늘이 나를 불러 깨우기 전이 생각났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도 모르던 때.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흐릿한 내 기억처럼 나도 세상의 흐릿한 기억이 되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져버리는 걸까. 나는 그러고 싶은 걸까. “당신도 포기하고 싶은 적이 있었나요?” 여자에게 물었다. “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이 포기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거든요.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주제에 무섭더군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났나요?” “이래 뵈도 오랫동안 돌아다녔으니까요.”

진지하게 말하던 여자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편안한 표정과 여유 있는 태도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나 보다. 그녀에게는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모든 것을 잘 견뎌냈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다. 처음은 하늘에게 도움을 받고, 기억은 겨우 두어 번 떠올렸을 뿐이다. 아주 조금 발버둥을 치다가 이내 지쳐서 단념해버리고 마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작게만 느껴졌다.

“힘든 거 알아요. 하지만 무서워하지 말아요. 모두 다 겪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냥 발길 가는 데로 따라가면 돼요. 꾹 참고 여행하다보면 모두 알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요. 당신의 기억에 휩쓸리지 말아요.” 불안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이 모두 보여줄 거예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이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라며,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이라고 미련 없이 일어났다. 나는 작별인사도 없이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끝이자 시작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내가 꿋꿋이 걸어간다면, 언젠가 저 뒷모습이 나의 뒷모습이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옅게 깔린 어둠 위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달로 시선을 돌린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사라졌다. 수평선이 어둠을 빨아들이며 본격적으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고,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내가 포기하지 않을 힘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요. 당신의 기억에 휩쓸리지 말아요.’ ‘이름을 짓는 걸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그녀의 말과 하늘의 말, 아무리 떠올려도 희미하기만 하던 기억 속의 달, 만나도 기억해낼 수 없던 그 사람. 이제 알 것 같았다. 달은 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답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밤하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달은 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도 그저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일 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더구나.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계속 한 가지만 쫓았고, 또 어떤 이들은 어느 날엔가 모습을 감추고 영영 볼 수 없었어.’ 선명했던 달이 점점 희미해졌다.

처음으로, 아주 작게 반짝이고 있는 별이 보였다. 이제껏 달에 사로잡혀 보지 못했던 별이, 그 반짝임을 깨닫고 나자 마음속으로 들어와 박혔다. 하나, 둘, 셋, 넷... 하얀 동그라미만이 그려져 있던 종이에 별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모든 별들이 내 눈 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땅에 닿은 발을 더욱 힘껏 굴렀다. 도미노처럼 늘어선 아파트 건물을 넘어 별이 더욱 가까이 달려왔다. 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몸을 뒤로 젖혔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처음으로 세상을 본 사람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멀리 떠나왔다. 돌아가서 다시 이름을 말해줘야겠다. 아마 이번에는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일어서서 옷을 털었다. 다시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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