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배기행 <4> 오현선생

오현(五賢). 5명의 현인이라는 뜻이다. 제주도에서는 우암 송시열,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을 오현이라 부른다.

▲ 오현선생을 봉향하기 위한 조두석이 오현단에 위치해 있다.


오현단의 시초는 귤림서원에서 비롯됐다.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에 유배됐던 충암 김정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8년 제주판관 조인후가 충암사를 창건해 위패로 모신 것에서 기원한다. 이후 1665년 서원의 규모를 갖췄고 1682년 송시열을 제외한 4현을 봉향했고 1695년 송시열을 추가했다. 이중 관리로 제주 땅을 밟은 사람은 송인수와 김상헌이고 나머지 셋은 유배를 왔다.

하지만 고종 때 귤림서원이 철폐되고 이후 오현의 위패를 모실 곳이 없게 되자 1892년 조천읍 출신의 김희정이 제주유림들과 함께 재단을 쌓고 오현의 위패 대신 조두석을 세워 오현단이 생겨났다.

◇원도심에 위치한 오현단

오현단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다. 제주시민회관 버스정류장에 하차해 바다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볼 수 있다. 오현단을 향해 걷는 동안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제주의 옛 원도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현을 기리는 비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송시열의 자취를 기리기 위한 유허비와 마애석각이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송시열이 쓴 증주벽립이라는 글씨로써 ‘증자와 주자를 공경하고 배운다’뜻이 담겨 있다.

◇오현선생, 제주에 오다

오현 가운데 제주에 첫 번째 발을 내딛은 것은 충암 김정이다. 그는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조광조 등과 함께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펴고자 했던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1519년 기묘사화(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 사림들이 숙청된 사건)때 극형을 선고 받는다. 제주목으로 이배되고 1520년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하게 된다. 김정이 제주에 머무른 기간은 1년 2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의 학문과 덕행은 제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문과 덕행은 귤림서원 창건의 기원이 됐고 조선후기 제주 유림사회에 정신적 구심체가 됐다.

이 후 차례로 규암 송인수가 제주목사로 부임하고 청음 김상헌이 안무사로 오게 된다. 김상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펼치며 청나라와의 화친을 거절한 의기있는 인물이다.

동계 정온은 윤리를 붙든 사람이었다. 그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려하자 “지금 한 동생을 용납할 수 없다면 다른 날 무슨 얼굴로 선왕의 묘당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후 대정현으로 유배오게 됐다. 정온이 유배된 터에는 송죽사가 세워졌는데 제주의 유림들이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우암 송시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론의 영수이다. 조선의 유교 발전에 큰 공을 쌓은 인물이다. 송시열 또한 제주에 오랜기간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는 숙종 때 왕세자 책봉문제를 반대하다 83세의 고령의 나이에 유배를 오게 됐다.

◇오현의 제주생활을 돌아보며

오현선생은 각자 다른이유로 제주도를 찾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제주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특별히 배울 곳이 없던 제주인에게 중앙의 관리를 역임했던 선비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것은 당연했으며 그들의 인품 등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의 영향으로 인해 제주사회는 좀더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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