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역사, 만주에 가다 <상>만주의 지배자 고구려

▲ 졸본성에서 바라본 비류수

중국 동북3성 본보 해외 취재

“삼국사기를 100번 읽는 것보다 만주에서 고구려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게 낫다.”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가 만주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고 하신 말씀이다.

2016년 7월 10일부터 18일까지 8박9일간 철기이범석 기념사업회(회장 박남수 전 육군중장)에서 운영하는 광복청년아카데미에서 제11회 해외사적지 탐방이 진행됐다. 이 기획은 만주 땅에서 발생한 우리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5세기 초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고구려의 유적지를 비롯해 36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항일 투쟁을 진행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 등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탐방이었다. 우리의 옛 영토였던 만주. 선조들이 남겼던 위대한 영토인 만주를 기자가 그들과 함께 동행했다. <편집자 주>

◇만주답사를 위해 단동으로 떠나다

답사일정은 체력과 인내의 싸움이었다. 7월 11일 현충원에서 행사를 시작한 대원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의 단동까지 16시간의 항해를 했다. 다행히 제주-인천의 13시간 배를 여러번 타본 기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2일 단동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답사단의 일정은 현재 동북 3성이라고 불리는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까지의 거리를 버스로 탐방하는 일정이었다. 그 안에서 고구려의 졸본산성 등정, 광개토왕비, 장수왕릉 탐방, 백두산 등정,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등 만주의 역사를 직접 확인 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졸본성으로 이동하던 중 탐방단을 이끌고 있는 정준 사무총장이 “현재 가는 지역이 남파공작원이 많은 지역이다”며 단원들에게 안전을 당부했다.

실제 탐방단원이 출발하는 시점에서 뉴스에‘북 공작원 800명 북중접경 건너와 활동’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말로만 듣던 공작원이 주변에 숨어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두려움을 잠시 잊고 창가를 바라봤다. 긴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압록강이었다. 단동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중국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렇게 창가를 바라보니 6ㆍ25전쟁 때 끊어진 압록강철교도 보였고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회군한 위화도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창가를 바라보다가 어느덧 시간은 3시간을 훌쩍 흘러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졸본성에 도착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

졸본성 아래에는 2004년에 준공된 고구려 유적지 박물관이 있었다. 그들은 졸본성을 오녀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동북공정의 일환이었다. 박물관 또한 오녀산성 박물관이었다. 동북공정을 보면서 답답했지만 마음을 뒤로한 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현지직원이 사진촬영은 절대 안된다고 말을 해줬고 아쉬웠지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거대한 영토가 그려진 지도였다. 고구려의 도읍지는 고주몽이 졸본성에 도읍을 정한 후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장수왕이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각각의 도읍지에는 평상시에는 국민들이 생업을 하며 살던 평시성과 적군이 침입했을 때 식량을 가지고 피신하는 피신성이 있었다.  졸본성은 홀승골성을 피신성으로, 국내성은 환도산성, 평양성은 대성산성을 피신성으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성을 쌓는 공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고구려는 성을 쌓을 때 둘레쌓기법과 큰돌과 돌 사이를 작은 돌로 채우는 쐐기박기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고구려만의 매장방식, 풍습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고구려 제20대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장수왕릉이다.


박물관에서 나온 후 버스를 타고 졸본성의 산중턱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졸본성은 해발 804미터이며 정상으로 통하는 입구는 서, 동, 남문 등 총 3개의 통로가 있다. 버스에서 내린 후 성의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999계단으로 유명한 졸본성을 올라가는 것은 힘에 부쳤다. 계단도 계단이었지만 70도 정도 돼 보이는 경사를 오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과거 고구려사람들은 이 성을 어떻게 올랐을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힘들게 정상에 도착한 후 흐르고 있는 비류수를 바라봤다. 선선히 부는 바람을 맞으며 비류수를 보니 과거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의 정기가 느껴졌다. 계단을 오를 때의 힘듦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스스로 패기가 느껴졌다. 다시 버스를 타고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이 있는 집안시로 이동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부자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은 우리가 책에서 배운대로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왕들이다. 광개토대왕은 만주로 영토를 확장했고 장수왕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켰다. 버스에서 내린 후 눈 앞에 보인 것은 광개토대왕비였다. 책에서만 보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크기가 정말 대단했다. 비석 앞에 섰을 때 마음이 숙연해지고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정복왕이었기에 위대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비 주변으로는 유리관이 쳐져 있었는데 훼손이 너무 많이 돼 비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관을 쳤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청나라 말기에 농부가 밭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석에 쓰여있는 글자를 확인하기 위해 불을 피웠다가 일부가 훼손됐다.  이후 일본이 또 일부를 수정해 시멘트로 보강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처음 봤을때는 이게 광개토대왕의 릉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크기도 평범했고 웅장한 느낌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반이 다 무너진 상태였고 보존도 잘 돼있지 않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중국은 자기 것이라고 확신하면 보존ㆍ복원을 하고 아닌 것 같으면 그냥 있는 그대로 둔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중국은 고구려를 본인들의 역사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동북공정과는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왕릉은 광개토대왕 릉에서 걸어서 약 5분거리에 있었다. 장수왕릉 앞에 도착하자 안내판이 하나 보였다. 안내판에는 “고구려는 중국 북방의 소수 민족 정권이다. 당나라와의 국내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또한 장수왕릉을 어느 장수의 무덤이었다고 추측하며 장군총이라고 폄하했다. 역사의 현장에서 왜곡된 안내판 등을 보니 ‘신문이나 책에서 보던 것보다 동북공정이 더 심각하구나’는 것을 느꼈다.

장수왕릉은 둘레쌓기 공법으로 쌓았는데 첫 단을 쌓고 이후 비스듬하게 흙을 쌓고 다시 비스듬히 두 번째 돌을 쌓는 방법의 연속이었다. 돌의 끝부분에 턱을 만들어서 돌이 밀리지 않는 고구려의 지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왼쪽 모서리 부분이 기울고 있어서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재 졸본성과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비 등 고구려 유적지는 2004년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놓은 상황이다. 만주에 있는 유적지를 보며 우리의 조상이었던 고구려인의 기상과 정신, 문화 등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안타까움도 느꼈다. 우리의 역사유적지에서 태극기도 펼칠 수 없고 안내판마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왜곡된 글귀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과거 고조선ㆍ고구려가 호령했던 만주가 더 이상 우리관할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허락을 받아야만 구경이 가능하는 등 너무나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다시 되찾을 역사 고구려. 그때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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