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러덜리스’

▲ 러덜리스 영화 중 한 장면. 주인공이 관객들을 대상으로 노래를 부르며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한참 음악 영화가 유행했을 때 <비긴 어게인> <위플래쉬>를 이을 진짜 음악 영화라는 컨셉으로 홍보 됐던 영화가 있다. 같은 음악 영화지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제30회 선댄스 영화제 폐막작으로도 상영된 바 있다.

러덜리스(rudderless)는 키를 잃은 배처럼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말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샘(빌리 크루덥)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잘 나가는 중년의 광고기획자 샘이 어느날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으로 인해 아들 조쉬를 잃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들을 잃고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요트에서 부랑자 같은 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전 아내가 가져다준 짐에서 아들이 만들고 부른 곡들의 CD와 가사 노트를 발견하게 된다.

아마추어 뮤지션이 노래하는 술집 트릴에서 아들의 노래를 부르고, 이를 들은 청년 쿠엔틴(안톤 옐친)은 샘에게 함께 음악을 하자고 제안한다. 우여곡절 끝에 밴드는 ‘러덜리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그들은 높은 인기를 얻으며 승승장구 하지만 아들의 전 여자 친구가 나타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밝혀져 밴드는 해산된다.

러덜리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음악을 통해 아픔을 이겨내는 여느 타 영화의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이 영화만의 차이점은 영화 중 후반부에 등장한다.

대학에서 다른 아이들을 6명이나 죽이고 자살한 학교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인 아들 조쉬와 그런 아들이 작사ㆍ작곡한 노래라는 것을 숨기고 대중 앞에서 부른 아버지. 영화는 복잡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가해자의 입장을 크게 고려해주지 않는다. 샘의 아들은 분명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렇지만 아버지 샘의 관점에서 영화를 느낀다면 형용할 수 없는 먹먹함을 가져다 준다.

주인공의 행동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쪽으로든 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영화는 음악이라는 주제와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주제를 함께 제시한다.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아들과 그 뒤에 따라오는 비난과 책임을 감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총기사건의 모습을 투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샘은 학교총기난사 사건의 피해자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인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조쉬는 그의 아들이다.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인 아들이 만든 곡임을 알고 밴드와 음악을 포기한 쿠엔틴에게 샘은 “quitters never win”라는 조언을 해준다. 도망쳐서는 이길 수 없다는 이 말은 아들이 살인자가 된 현실 속에서 방랑하고 있는 자신에게 전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한 적이 없던 샘은 처음 노래를 불렀던 술집에서 자신의 사연을 밝히며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숨을 죽인 채 듣는다.

아들이 완성하지 못한 노래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완성시킨 노래 ‘Sing Along’의 가사 중 “만약 어딘가에서 이 노래를 듣고 있다면 같이 불러 다오 내 아들아”에서는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가 떠난 아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메시지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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