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주는 위로 <3> 기억의 정원 두맹이골목

▲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벽화들이 골목 곳곳에 그려져 있다.

돌이 많다던 ‘두무니머들’이 제주의 숨은 비경으로
‘보고 걷는 길’보다 ‘놀면서 추억을 쌓는 길’이어야

◇시간, 그리고 기억

‘너무 빠르다.’ 훅하고 숨을 내쉰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킨다. ‘아차!’ 고개를 든다. 저만치 앞서 있는 것이 낯설다. 좀 전까지 보던 것이 아니다. ‘어디에 있을까.’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내다본다.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거둔 다음 순간, 낯설게 보이던 것이 어딘가 낯이 익다. 그렇다. ‘너무 빠르다’하고 고개를 숙이기 전만 해도 곁에 있었다. 그것이 저만치 앞서 있다. 그만큼 뒤처졌다는 말이다. 다리에 힘을 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금니를 깨문다. 단내와 함께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앞을 본다. ‘멀어지고 있다.’ ‘아니, 이제는 너무 멀다.’ 그제야 뒤를 돌아다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이 거슬러 펼쳐진다. 그게 ‘시간’이다. ‘기억’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초당 29.98프레임으로 되풀이 되는 시간이다.

◇기억의 정원

제주시 동초등학교 남쪽, 현재 일도2동 주민센터의 북쪽에는 ‘기억의 정원’이 있다. 2008년부터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조성된 ‘두맹이골목’이다. <제주시 일도2동 두맹이골목 공공미술프로젝트보고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업의 최초 아이템은 이 골목이 포함된 일도2동을 지역구로 하는 오영훈 도의원(현 국회의원)의 제안에 의해서 이뤄졌다. 제주도에서 어쩌면 가장 난해하고 낙후된 동네의 하나인 일도2동의 주택지역인 이곳을 가장 볼만한 골목으로 바꾸어 보자는 제안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제안에 동의한 우리는 여름 땡볕에 현장을 방문하면서 답사하고, 주민들과 인터뷰를 해가면서 또는 역사적인 자료를 뒤적이면서 이 동네의 설촌 유래부터, 두맹이란 명칭까지 찾아냈다.”

일도2동 주민자치위원회와 탐라미술인협회 공공미술연구회는 골목을 누비며 얻은 결과물로 제주민예총이 주관한 공공미술공모사업에 응모했다. 1차 프로젝트는 도시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곳(319m)에서 이루어졌다. 환경개선에 초점을 맞추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벽화를 그려 넣었다. 2차 프로젝트가 진행된 2009년에는 제주지역 대학생들이 더 많은 벽화를 그려넣었다. 2009년 12월에는 동초등학교, 일도초등학교, 인화초등학교 등 인근 3개 초등학교 학생 1500여 명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한 타일벽화가 제작되었다. 이 구간(700m)에서는 주민들의 소통과 공동체 의식 함양에 주안점을 두고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40여 년 전에는 두맹이골목으로 불렸던 그곳은 제주의 숨은 비경 31개 가운데 하나인 ‘기억의 정원’이 되었다.

◇돌 많던 두무니머들

두맹이골목은 옛 지명 구중동과 두문동에 걸쳐 있다. 1998년에 출간된 <제주시의 옛 지명>에 따르면, 구중동의 중(重)은 옛날 높은 사람이 다니던 길로 추정되지만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두문동은 구중동네 동쪽으로 돌이 많아서 ‘두무니머들’이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곳에는 땔감으로 사용되던 가시덤불과 무덤, 골총 등이 얽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골총은 임자가 없어 벌초를 하지 않거나 후손이 끊겨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지된 무덤인 고총(古塚)을 가리킨다. 이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면서 ‘슬’이라는 이름을 붙여 ‘두무니슬’, ‘두무니세’로 불렀다가 두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구중로와 두문로가 성 동쪽의 공동묘지였다. 그러니 여기에 마을이 이루어진 것은 제주성이 해체된 이후일 것이다. 제주성이 1910년대에 해체되었다면,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두문동까지 마을이 번성하게 된 것은 1970년대라고 한다. ‘기억의 정원’으로 조성된 두맹이골목은 두문1로부터 구중 1, 2로를 거쳐 구중샛길까지 약 1km 거리다. 이 골목을 걷다보면 1960년대쯤 지어진 집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마을이 번성한 때를 짐작하게 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 아스팔트포장이 된 바닥조차도 1960년의 풍경 가운데 하나로 흡수된 듯이 느껴진다. 그 덕분에 ‘추억’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기억의 정원’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기억의 밀푀유(mille feuille), 천 개의 기억

▲ 아이들이 뛰어 놀아야 골목이다.


켜켜이 쌓인 얇은 파이 껍질 사이에 두 세 층의 크림을 넣은 디저트를 프랑스에서는 밀푀유, 곧 ‘천 장의 나뭇잎’이라고 부른다. 켜켜이 쌓인 얇은 파이 껍질을 퍼프 페이스트리(Puff Pastry)라고 한다. 수백 겹 페이스트리를 만들 때는 이스트를 넣지 않는다. 밀어서 편 밀가루 반죽 위에 버터나 라드(Lard)등의 유지를 펴 바른 다음 반죽을 접어서 밀대로 밀고, 다시 접는 과정을 반복한다. 접고 밀어서 펴는 과정을 반복해서 구워냈을 때 무수한 결이 생겨나는데, 2천 겹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과 도시도 일상을 접고 밀어서 펴는 과정을 반복해서 천 개의 기억, 아니 수천수만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접고 밀어서 펴는 일상의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2008년을 전후해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제주에 찾아들었다. 이들을 맞이하면서 제주는 다양한 두맹이골목들을 만들었다. 야심차게 시작하여 성대한 결과를 본 일도 많지만, 지리멸렬하게 되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일도 적지 않다. 두맹이골목을 찾는 관광객들과 그들이 남긴 블로그 게시물들이 많은 것을 보면, ‘기억의 정원’ 프로젝트는 꽤나 성공한 사례로 보인다. 벽면에 그려진 동네 구석에서 말뚝박기하는 아이들, 딱지치기하는 아이들, 축구공을 들고 전봇대 뒤에 숨어 있는 아이들은 흑백사진첩을 뒤적거릴 때 받게 되는 위로를 준다.

◇여기, 지금의 기억을 만드는 창조

‘너무 빠르다’하고 고개 숙인 순간 저만치 앞서 가버린 현실이 원망스럽고 외로울 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재생되는 수천수만 겹의 기억은 기분 좋은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 달짝지근한 맛에 너무 중독되어 있다는 데 있다. 예능, 문화콘텐츠, 도시공간에 이르기까지 ‘복고와 재생’이 황금률이 되었다. 물론 복고든 재생이든 그 모든 것이 ‘여기, 지금’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때, 거기’를 ‘여기, 지금’ 불러 세우는 까닭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기, 지금’은 ‘그때, 거기’로 접고 밀어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 제주의 곳곳에 있는 두맹이골목들은 ‘보고 걷는 길’이 아니라 ‘아이들이 뛰어 놀면서 추억을 쌓는 길’이어야 한다. 요즘 들어 회자되는 ‘창조’란 본래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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