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나 토드의 『민중』을 통해 본 보통사람들의 역사

저명한 한국 고대사 연구자 한 분이 국정교과서를 옹호하면서 한국의 현대사는 ‘운동권 연표’처럼 보인다고 했다. 역사를 ‘아래로부터’(from below) 보는 것이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분도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문헌에만 의존하는 왕조사 중심의 고대사에서조차 ‘백성’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저항을 빼고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속한 ‘현재’의 지배 질서를 문제 삼는 것이 언짢으셨던 것 같다.

포스트-모던한 다양성의 시대 모든 대상은 인식하는 사람의 생각에 달렸으니 그 역사학자의 견해도 하나의 입장으로 받아들여 보자.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강조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역사해석의 차이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좀 더 비판적으로 말하면 보통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민중’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주체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은 언제나 굴곡이 있고, 겹쳐짐이 있고 주름이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틀은 매끄럽고 평평하다. 민중은 강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대의를 위해 사적인 이익은 포기하는 그런 사람들로 정의된다. 하지만 역사속의 민중은 거칠고 폭력적이며 작은 이익에 따라 흔들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교육받은 ‘고매한’ 지배층들에게서조차 기대할 수 없는 ‘덕성’(virtue)을 그들에게 투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의 왜곡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해석의 혼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좌파와 우파(를 자처하는) 모두의 오류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 대상이 역사이건 자연적 대상이건 간에 객체를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인간은 ‘언어’의 한계 속에 갇혀 있고 대상은 언제나 언어적으로 해석되어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 인식이 지적 허무주의(nihilism)나 상대주의(relativism)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오직 하나의 철학적 입장만이 옳고, 오직 하나의 인식과 해석만이 맞다는 독단론을 포기한다면 우리 모두는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향해 전진하는 공동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아래로부터 해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적 실천 자체가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민중』에서는 이러한 시위가 언제나 끊임없이 성취되고 갱신돼야 하는 집합적 정체성을 갖는 민중들의 정치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던한 세상이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자원은 거대서사(grand narrative)에 갇혀 있었던 역사 속의 작은 떨림과 진동을 다시 드러내는 것이었다. 지배자들의 거대서사에 맞서 피지배자들의 거대서사를 ‘발명’했던 좌파의 독단주의에도 항거하는 것이었다.

지배 엘리트의 이데올로기로만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만큼 그저 현실을 살아 내었지만 그들의 집합적인 흔적이 역사의 중요한 동력이었던 사람들을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덧씌워 무결점의 주체로 만들어 내었던 좌파의 역사 인식도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 무결점의 민중을 마음속에 품고 ‘사회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결점들’을 확인하게 될 때 ‘운동의 위기’가 생겨난다. 삶의 조건과 역사적 상황은 바뀔지라도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읽어내는 ‘지식인’들의 생각이 변하고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의 전범으로 알려진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떠올려 본다. 1000쪽이 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얻게 되는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역사를 만들어 왔던, 그들 나름의 의식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잊혀진 목소리를 되살려 내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라는 것,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이념’을 덧씌우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서술 방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톰슨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자신의 역사 서술을 더 이상의 비판에서 면제된 ‘완성본’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과거)현실과의 대화를 통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셀리나 토드(Selina Todd)는 톰슨이 제시한 역사방법론을 20세기 영국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저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 삼촌과 이모들이었다. 공장에서, 거리에서, 마을에서 마주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이라는 머나먼 나라, 1910에서 20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공장, 거리, 마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토드는 평범한, 그래서 쉽게 흔들리고 역사적 대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사람들이 영국을 만들고 지탱했다는 것을,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한다. 한 명 한 명으로는 ‘무식’하고 ‘무력’하지만 그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민중’이라는 이미 만들어진 ‘이념형’으로 묶이기에는 너무 다양했다. 성차, 종교, 인종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질시와 시기의 감정이 충만해 있었고 자신이 속한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그것을 성취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을 성차별적이거나 인종주의적 폭력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좌파는 이들을 혁명적 ‘노동계급’으로 정의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혁명적이기는커녕 극우파시즘에 경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이 ‘살아낸’ 흔적을 폄훼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같은 사람들이 역사 속의 결정적 장면에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 설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서조차 그들의 모습은 고결하거나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톰슨이 듣고 싶었고 토드가 살려내려고 했던 보통사람들의 목소리는 단일하지 않으며 무수히 많은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와 보자. 고대사를 전공한다던 그 노 역사학자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 분의 눈에는 ‘운동권 연표’로 보이는 우리의 현대사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자부심’과 ‘뿌듯함’이 함정이었다.

어느새 ‘민중’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민중’이라고 불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역사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민중’을 찾으려는 지식인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현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아우성과 몸짓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 아우성과 몸짓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금-여기’에 있지만 지식인들의 담론(discourse)에서는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 동안 사람들의 아우성과 몸짓을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기적인 생떼부리기라고 말하던 유력 정치인이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언급해야 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보통사람들의 불만과 좌절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불만과 좌절에 ‘민중’이라는 이름, ‘계급’이라는 이름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런 것처럼 소수 지식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고결한 것도 아니어야 한다.

민중과 계급은 불완전하고 그래서 언제나 끊임없이 성취되고 갱신되어야 하는 집합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과 계급은 정치적 실천의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역사의 해석이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정치적 실천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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