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무니와와 ‘인격주의(Le personnalisme)

‘인격’에 관한 관심은 철학사 초기부터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인간학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인격’에 대한 관심과 20세기 인격주의 운동

인격에 해당하는 라틴어의 ‘페르소나(persona)’는 그 기원이 그리스어의 ‘prosopon’에서 유래한 것이다. 흔히 개성 혹은 자아로 이해되는 ‘페르소나’는 중세철학에서는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고차적인 개념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 ‘인격주의(personnalisme)’가 하나의 철학적 사조로서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겪게 되는 인류의 비극과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에 의한 정치적인 위기를 맞이한 유럽인들에게는 기존의 정치나 종교적인 사상으로는 인류의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유가 팽배하였고, 새로운 휴머니즘과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증가하였다. 다른 한편 만연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공동체적인 삶을 약화시켰다. 한 개인의 개별적인 삶이나, 주관적인 판단에 대한 존중은 ‘함께하기’라는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고, 이는 현대사회에서 광범하게 퍼져 있는 이기주의적인 경향성을 낳게 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증가하는 유토피아적 사회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성에 맞서 개인의 개별적인 삶과 동시에 사회의 공동체적인 삶을 동시에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일군의 철학자들이 ‘인격주의’를 철학적 기초 이념으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인격주의’를 특정한 사상이나 사조를 지칭하는 말로 처음 사용한 철학자는 프랑스 철학자 흐누비에(Renouvier)였으며, 이후 독일 철학자 막스 쉘러와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무니에로 이어졌다. 특히 엠마누엘 무니에(Emmmanouel Mounier)는 자신의 사상을 ‘인격주의’라 부르면서 평생을 인격주의에 대한 사유를 정립하는데 바친 사상가이다. 엠마누엘 무니에의 ‘인격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인격’의 개념을 어떤 특정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가정하지 않고 인간현상 그 자체에서 드러나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인격의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며, 세계역사와 사회적 발전에서 ‘사회의 인격화’로 이러한 인격의 개념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인류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 그 자체를 ‘인격화’의 방향으로 기획하고 창조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만 인류의 미래가 인간다운 삶과 인류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것이 엠마누엘 무니에의 생각이었다.

◇ 엠마누엘 무니에의 인격개념이 가진 3가지 특징들

무니에의 ‘인격’이 가지는 개념에는 무엇보다 먼저 전체주의적인 사유에 매몰된 ‘개인의 가치’와 ‘인격의 수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에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인격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인데, 그는 그의 사상 전반을 통해서 인격의 3가지 특징을 ‘비-규정적 특성’ ‘개별적이고 관계적인 특성’ 그리고 ‘역동적인 특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인격은 무엇보다 먼저 ‘규정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나타난다. 엠마누엘 무니에는 인격을 규정함에 있어서 인격을 하나의 사물이나 대상으로 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격이란 ‘한 개별자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고유한 무엇이기 때문에 ‘규정’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한국인, 한사람의 기독교인 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있어도 ‘한 소크라테스’ ‘한 홍길동’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가 없다. 즉 인격이란 어떤 ‘유적인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이며, 객관화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엠마누엘 무니에는 “인격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대상도 아니며, 우리가 외부로부터 알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인격은 우리가 내면으로부터 알고 있는 유일한 실재이며, 모든 곳에 현존하지만, 어떤 곳에도 주어져 있지 않다(Le personnalisme, p. 10)”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 개인을 ‘인격’으로 고려할 때, ‘진정한 그 자신’을 아는 것이며, 이는 또한 우리가 지엽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그에 대한 앎을 넘어서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인격’은 본질적으로 ‘규정이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격이 ‘비-규정적’인 이유는 단지 그가 총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격은 본질적으로 성장 중에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는 운동처럼 나타나기에 비-규정적인 것이다. 무니에 인격을 “자기-창조성(auto-cr’ation)으로부터, 소통으로부터 그리고 해방으로부터의 체험된 행위성(activit’ v’cue)”으로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인격화’하는 존재이며, 이미 ‘인격화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이란 어느 정도 ‘인격화된’존재이며, 인격화를 완성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인 것이다.


둘째, 인격은 개별적이지만 또한 관계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인간자체’는 없듯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실 개별자들이다. 그런데 크리스천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엠마누엘 무니에에게 있어서 인격의 근원적인 특성은 ‘신성한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그는 “신 그자체가 -비록 탁월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개별적이며, (...)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성에 참여하면서 인격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인격은 한 개별자에게 있어서 ‘완성’을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비록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왔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고자하며, 도약을 감행하고 ‘개별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바로 여기에 인격으로서의 자유가 존재한다.

하지만 성급한 집단문화와의 대면은 인간의 정신적인 삶의 황폐화를 유발하고, ‘자유’를 제한한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한 개인의 고유한 사유와 개별적인 의미를 통한 선택과 행동을 방해하고 익명적이고 물리적인 힘에 의해 한 인격체를 ‘외면성(ext’roprit’)’의 감옥에 감금하고 만다. 따라서 인격을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내면성을 회복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적인 혹은 내적인 세계를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소통이란 이러한 ‘내면성’을 회복하였을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소통’을 의미하는 ‘실존의 열림’이란 숨겨져 있는 ‘내면성’을 열어 제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관계성은 바로 이러한 ‘고유한 자기 자신’을 타자의 그것과 교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려져 있는 내면성을 “스스로를 열면서 (...) 인격체는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투명하게 되는 것”이다. 무니에에게 있어서 ‘실존의 열림’이라는 이러한 인격의 특성은 ‘개인주의’로부터 ‘인격주의’를 구분해 주는 척도이다. 무니에는 ‘사회적 책임성’은 우선적으로 “타인을 수용할 수 있기 위해서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아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존”을 가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한 개인의 인격이란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인격은 그 자체 중단 없는 창조를 의미하는 역동성으로 나타난다. 무니에의 인격주의는 본질적으로 휴머니즘으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인간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향하는 ‘인격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한에 위치한 가치들(les valeurs situ'es'l'infini)”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 비-규정적이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해가는 특성을 가진 것이라는 차원에서 이러한 인격의 행위는 무한 혹은 절대적 특성을 띠게 된다. 무니에는 이러한 인격체의 지향성을 “사랑의 행위(l’acte de l’amour)”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한 인격체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반박할 수 없는 실존적인 자아의 진술,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삶은 가치가 있다”로 요약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에 따라서 한 개인이 인격적으로 행동한다거나 인격적으로 되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끊임없이 무상의 행위, 헤아림이 없는 자비의 행위 혹은 선과 가치의 산출을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창조적인 삶을 일구어가는 역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자신의 소명’ 혹은 ‘부름(invocation)에 대한 응답’처럼 고려하고 있다. 인격주의가 지향하는 윤리는 보다 ‘인격적이 되는 것’이 전부이다.

크거나 작은 것, 혹은 위대하거나 하찮은 것은 질료적이고 외면성의 질서에 있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정신적이고 내면성의 질서에 있는 인격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인격화하고 나아가 사회를 보다 인격화하는 무엇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인격주의의 지향성은 현대사회를 병들게 하는 ‘과도한 자본주의’나 무한 경쟁을 그 원리로 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에 지친 영혼들에게 빛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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