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와서 느림의 미학과
적절한 습도의 중요성 느껴
넘치는 것은 버리고
모자란 것은 채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살아보니 어떠냐고 묻는다. 올 봄 학기부터 제주대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일 년이 채 못 된 셈이다. 그래도 지난 겨울의 끝 무렵부터 올 가을까지 살아봤으니 제주의 사계절을 그럭저럭 조금씩 맛본 게 된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지만 그때그때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풀어왔던 것 같다. 제주의 ‘마술적 리얼리즘’(남미문학의 놀라움을 향한 이 용어는 본래는 ‘마술적 현실’이 오해된 것이라 한다)에 값하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부터 택배비처럼 조금은 더 지불해야하는 고독, 제주의 몇몇 사회적 문제와 현안에 이르기까지, 다른 이주민들과 별로 크게 다르지 않은 체험과 의견이었다. 이쯤 되니 나름대로 나만의 의견을 내놓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냐만, 같은 체험을 달리 말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통찰력을 메워 보면 어떨까.

제주도에 와서 달라진 건, 속도와 습도라고 말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리듬으로 세상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요즘이다. 그런 시절에 아름다운 자연의 리듬에 눈 맞추는 일은 얼마나 복된가. 제주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동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다르다고 말한다. 정말로 자동차로, 오토바이로, 자전거로, 도보로 여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체험일 것이다. 느린 걸음으로 제주의 길과 숲을 걸을 때, 자동차로 달릴 때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시때때로 얼굴을 바꾸는 작은 들풀과 꽃잎, 돌담 위로 엿보이는 노랗게 익어가는 귤, 나무그늘 아래 작은 버섯, 비 갠 청명한 하늘,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인 낙조.

제주의 높은 습기도 나를 놀라게 했다. 옷과 가방에 피어나는 곰팡이꽃과 방바닥의 축축함이란! 한편 심한 안구건조로 읽기와 쓰기가 무척 고생스러웠던 내게 봄날의 촉촉함이란 또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던가! 나는 그렇게 제주의 습도로 두 번 놀랐다. 생각해보니 사람살이에서도 적절한 습도는 꽤나 중요하다. 여름보다 겨울에 감기에 더 잘 걸리는 이유는 낮은 습도 때문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안구건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대인들에게도 적절한 습도는 촉촉한 눈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너무 높은 습도는, 제주도민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것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불편을 만들어낸다. 너무 높은 면역이 자가면역질환을 초래한다고 들었다. 면역력 역시 너무 높아도 좋은 건 아니라는 것. ‘적절한’ 면역력이 건강한 삶의 조건이다. 습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조화와 균형에 대해 말하게 된다. 중용의 미학이라니, 이 얼마나 재미없고 관습적인 이야기란 말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조화와 균형이란 것도 수많은 부조화와 흔들림 속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조화와 중용의 감각이란, 어쩌면 보수적인 부동자세의 관념이 아니라 엇나가고 빗나가는 일탈과 불균형 속에서 겨우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넘치거나 모자란 것은 좋지 않지만, 넘침과 모자람의 기우뚱한 총합이 넘친 것을 버리게 하고 모자란 것을 채우게 한다. 늘 느리게만 산다면 역시 새로운 풍경의 발견과 경탄의 순간이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삶의 리듬 속에서 다른 공기를 호흡할 때, 새로운 풍경은 탄생한다. 여행이나 이주의 경험이 값진 것은 그래서다. 오늘 느릿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나무 아래의 작은 버섯을 돋아나게 했다. 그런 걸음이 없다면 내게 녀석 따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적절한 습도가 없다면 곰팡이의 사촌이나 팔촌쯤 될 버섯이 자랄 수 없을 터. 실은 그 버섯을 보고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맘먹었다. 이 어수룩한 글조차 제주의 마술적인 리듬과 공기 속에서 싹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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