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주는 위로 <5> 성안물길 산지천길
제주시민들의 식수원에서 탐라문화광장으로
어제를 돌이켜보고, 내일을 불러 세우는 곳

▲ 산지천은 옛 제주의 식수원이었기 때문에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해 있었다.

◇물길, 그리고 레테(Lethe)

가을 초입을 비껴선 제주는 싸늘해도 청명해서 좋다. 고사리 장마, 무더운 여름, 가을 초입의 태풍은 청명한 가을 아침과 만나면 망각(妄覺)의 강을 건넌다. 망각의 강, 레테(Lethe). 망각은 분쟁의 딸이다.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정작 잊힌 것은 괴롭다. 테티스(Thetis)와 펠레우스(Peleus)의 결혼식에 잊힌 에리스(Eris)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 분쟁의 여신은 여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황금 사과 하나를 던진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For the fairest)’. 황금사과에 써진 문구는 헤라(Hera)와 아프로디테(Aphrodite), 그리고 아테네(Athena)의 분쟁을 일으켰다.

이 분쟁은 아프로디테를 선택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에 의해 종결된다. 덕분에 그는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얻었지만, 그래서 일어난 트로이전쟁에서 전사한다. 이 전쟁은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Achilleus)의 목숨도 앗았다. 올 가을 제주는 아직 망각의 강을 완전히 건너지 않았는지 비가 잦다. 도심을 흐르는 물길, 산지천(山地川)에도 빗방울이 듣는다.

◇제주 도심의 대표 하천이자 옛 식수원

제주의 땅 모양은 한라산의 북사면이 단계적으로 낮아지는 모양인 데다, 분수령이 동서로 뻗어 있다. 그래서 하천이 대개 북쪽과 남쪽으로 흐른다.

산지천은 한천(漢川)ㆍ병문천(倂門川)과 제주시 3대 하천으로 손꼽힌다. 이 3대 하천 외에 별도천(別刀川)과 도근천(都近川) 북쪽으로 흐르고, 영천천(靈泉川)ㆍ감산천(紺山川)ㆍ가내대천(加內大川)ㆍ연외천(淵外川)ㆍ동홍천(東洪川)ㆍ도순천(道順川) 등이 남쪽으로 흐른다. 제주섬에는 큰 하천이 35개쯤 있는데, 대부분 비가 내릴 때만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이다.

하지만 장마나 큰 태풍, 소나기가 쏟아지면 급작스레 물이 불어나서 물난리를 겪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빗물은 현무암이 갈라진 곳으로 스며들어 땅 밑으로 흐른다. 그러다가 해안선에 이르러서 솟아나 샘이 된다. 이 샘을 중심으로 제주의 마을들이 조성되었다.

산지천은 한라산 북사면 관음사 남쪽 해발 약 720m 지점에서 발현해서 제주시 아라동, 이도동, 일도동을 차례로 흘러 하구(河口)인 건입동의 제주항을 통해 바다로 나간다. 산지천은 제주시 상권의 중심지역을 흐르는 대표적인 하천으로, 폭에 비해 전체 길이가 가늘고 길게 나타난다. 중상류는 하상(河床) 경사가 급한 산지계곡의 특성을 보이지만, 하류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전형적인 도시 하천의 특성을 보인다.

산지천은 하류 구간에서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나서 유명하다. 하류 구간과 그 주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즉 산짓물[山地泉], 금산물, 지장깍물 등의 용천수들은 제주시에 상수도가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제주시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되었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이 구간에는 뱀장어, 은어, 숭어, 학꽁치 등의 어류가 서식하고, 해오라기, 쇠백로, 흑로, 왜가리 등의 많은 조류가 찾아든다.

◇바다에 다다른 내[川]

산지천 주변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유적지를 비롯한 관광 명소들이 분포하고 있다. 상류의 관음사를 비롯하여 탐라목석원, 산천단,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신산공원, 삼성혈, 제주성지 등이 있다.

하류는 제주와 육지부를 잇는 산지항(山地港)과 인접해 있어서 일찍부터 상권과 주거시설이 형성되었다. 행정당국에서는 산지천 정화와 개발의 상징으로 산지천 하류 구간인 일도1동 동문교에서 건입동 용진교(勇進橋)까지 474m 구간[너비 21~36m]을 1966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약 30년 동안 복개하였다.

복개 구간에는 상가건물을 지어 주상복합지구로 이용했다. 그러나 오물 투기 및 폐수 유입으로 도시오염지대로 전락한 데다 1990년대 초 건물 붕괴 우려까지 발생하자, 1995년 철거를 시작하였다. 이후 1996년 3월부터 2002년 6월까지 약 6년 동안 총 사업비 365억원을 들여 복원 정비하여 산지천은 생태하천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제주읍성 동쪽 1리에 있으며 2리쯤 흘러 바다로 들어가면 건입포(健入浦)가 된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과 산지천 하류(건입동)에 금산(禁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산지천이라는 이름은 금산 아래를 흐르는 ‘내(川)’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골목길을 벗어난 문화광장

산지천 하류 복원 후 하천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길이는 500~600m에 이른다. 중간 중간에는 아치형 다리가 놓여 있다. 하천의 끝은 바로 앞에 있는 부두 근처 바다로 바로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옛 사람들의 삶과 만나게 된다. 광제교(廣濟橋)에는 큼직한 바위와 조그만 석상이 눈에 띤다.

태풍과 홍수 등의 자연재앙을 막기 위해 세운 경천암(擎天岩) 위에 세운 조천석(朝天石)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조두석(俎豆石)으로, 조천석 진품은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 내에 전시되어 있다. 매번 물난리와 식수오염으로 고생했던 주민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광제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눈에 띠는 빨간색 건물 아라리오 뮤지엄과 회색 건물 김만덕 기념관이 보인다.

산지천의 끝자락 용진교에서 건입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김만덕 객주터와 함께 지장깍 동산에 자리 잡은 건입동의 다양한 역사 유적터를 만날 수 있다. 산지항 유물 출토자리, 제주 최초의 얼음 공장인 제빙공장 자리, 제주 옛 민간등대를 재현한 등명대 등이다.  하지만 오늘 산지천 주변은 제주시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추진 중인 탐라문화광장 공사로 몸살이다.

제주도는 2011년부터 사업비 917억원을 투입해 제주시 건입동 일원을 탐라문화광장으로 조성하고 있다. 탐라문화광장사업은 제주시 동문로터리에서 동진교에 이르는 길이 350m의 산지천 일대4만9000㎡에 테마정원과 생태하천, 세계음식점 테마거리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16세기 제주읍성을 넓히면서 성내(城內)로 들어온 산지천은 1960년대의 복개, 1990년대의 복개철거와 복원 등을 거쳐 이렇게 다시 광장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산지천변의 어느 주민이 했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산지천을 복원할 때 이 사업이 끝나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고 했지만 어디 그랬냐? 사람이 사람을 불러 모으는데, 사람 살던 흔적을 없앤 곳에 탐라문화광장을 만든다고 관광객이 올 지 의문이다.”

◇단(端), 시작의 끝과 끝의 시작

잊을 수 있다는 것, 잊힐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기억해내지 못해서 안타깝고, 잊혀서 분개하지만, 그것조차도 잊을 수 있다면 망각은 특권이다. 망각은 기억의 가치를 창출한다. 모든 이항대립되는 것들은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내[川]는 산이 끝난 자리에서 큰물을 만난다. 그곳이 산을 내달린 물이 끝나는 자리다. 물이 끝나는 하단(下端)은 바다가 시작하는 자리다. 단(端)은 이렇게 끝이면서 시작이다. 그래서 그것은 시작의 끝이면서 끝의 시작이다. 오늘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은 ‘어제의 끝이면서, 내일의 시작’이다.

아주 오래 전에 시작한 우리의 삶이 끝맺는 한편으로, 앞으로 이어나갈 우리의 삶이 시작한다. 단(端)의 기호는 ‘|’가 아니라 ‘-’다. 이곳과 저곳 사이에 굳건하게 서 있는 ‘격벽’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을 건네주는 ‘다리’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삶을 기획하기 전에 어제를 돌이켜보고, 내일을 불러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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