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빛> 백수린|창비

백수린의 두 번째 단편집 『참담한 빛』에는 「스트로베리 필드」를 위시한 그녀의 근작 열 편이 담겨 있다.

그녀의 단편들은 잘 읽힌다. 왠지 낯익은 느낌이다.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들통 나서는 안 되는 비밀”(48면)을 들려주겠다든지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249면)이 들었다고 하는 식의 기술이 눈에 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삶의 감춰진 진실을 탐색하는 데에서 소설의 의의를 찾으려고 하는 한국소설의 오래된 전통에 맞닿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때 내가 결혼을 재촉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같이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면”(27면)이라든지 “내가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122면) 인생이 달라졌을지 회의하는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그녀는 ‘운명’과 관련된 해석학의 오래된 주제에 가 닿고 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일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 비극적인 결과 앞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자주 묻곤 한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서 보면 먼 미래는 그저 여러 가능성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비참한 심정으로 지나간 일들에 대해 후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통해 인간의 삶은 더 깊이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단편들은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추리소설의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자신의 삶을 반추할 때,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19세기 추리소설 속 괴팍한 주인공”(9면)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어린 시절 입양간 이종사촌이 국제우편으로 보내온 사진 뒷면의 “암호 같은 몇 개의 문장”(「시차」)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실명한 아버지의 첫 사랑을 찾아 함부르크까지 날아간다(「북서쪽 항구」)고 하는 설정은 추리소설의 도입부와 유사하다. 할아버지와 새할머니가 어떻게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을까 하고 노골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방식을 택한 경우도 있다(「중국인 할머니」).

이렇게 몸 가볍게 움직이는 일종의 유사 추리소설적인 구조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소설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에도 행방불명된 아내나 연인을 찾아 헤매는 남자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왜 경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문제의 해결에 나설까. 이 물음을 그대로 백수린에게도 돌려줄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소위 ‘세월호 이후’의 단편들을 모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녀는 무언가 결정적으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천착한다. 어디에선가는 옴진리교 사건이나 9ㆍ11, 4ㆍ16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터널 사고가 일어난다. 세상이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렸을 때, 우리는 모두 세계에 던져진 이방인이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높은 물 때」에서처럼 ‘나쁜 결말’이 꿈으로 판명된다든지 하는 일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은 ‘불가역성(不可逆性)’을 띠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전쟁과 테러, 혹은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일들이 되풀이 되는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국경의 밤」). 업보이니 견뎌야 할까? 작가는 환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