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섬의 과거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준다. 섬의 전통문화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꾸는 인류의 소중한 참고서이다. 섬은 지구에서 인류가 지속가능하기 위한 지혜를 배우는 학교요,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자원과 공간이 제한된 섬의 전통문화는 유한한 지구에서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묻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답을 제시해줄 수 있다.

제주섬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이면서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지금은 제주섬이 유네스코 3개 자연과학분야에 등재될 만큼 자연환경의 빼어남을 자랑하지만 예전에는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三多), 비, 바람, 가뭄 피해가 심해 삼재(三災)의 섬으로 불려왔다. 이처럼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형성된 제주사람들의 지혜는 인류가 어떻게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제주의 전통문화는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부정적인 면들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민간신앙에는 비합리적 요소가 있고, 돗통시에는 비위생적 요소가 있으며, 계모임은 불필요한 과소비를 부추기고, 궨당문화는 합리적 선택과 비판마저도 질식시키는 맹목적 연고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제주의 전통문화에서 취해야 할 것은 내용과 형식 그 자체보다는 그 속에 깃든 정신과 지혜이다.

◇생태사회를 위한 생태설계

1) 자원순환 사회

제주도는 19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법 등이 제정되고, 사람ㆍ상품ㆍ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기업활동의 편의가 최대한 보장되도록 규제완화 및 국가적 지원의 특례가 실시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린 공간으로 되고 있다. 오늘날 제주의 인구가 급증하여 65만에 이르고 연간 1500만 관광객이 제주를 다녀가면서 교통난이 가중되고 폐기물이 넘쳐나고 있다.

건강한 생태계에서는 각 구성원들의 폐기물이 다른 구성원들의 자원으로 되기 때문에 지속가능하듯이, 인간사회도 생태계의 원리를 잘 이해하여 삶과 제도에 잘 활용한다면 지속가능할 수 있다. 제주의 돗통시는 제주사람들의 생태적 삶의 근거지로써 인분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음식물쓰레기를 사료로 이용하고,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까지도 유용한 자원으로 되돌려 놓았다. 돗통시는 생태적 삶은 “순환하는 삶 = 풍요로운 삶 = 삶의 질이 높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생태사회는 폐기물을 자원으로 순환시키는 사회이다. 폐기물은 처치 곤란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귀중한 자원이다. 생태적 삶은 풍요롭고 아름답다.

2) 상부상조 사회

닫힌 사회에서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인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제주사람들은 대소사를 치르는데 필요하거나 혼자 마련하기 힘든 재화는 공동으로 마련해서 돌려썼고, 혼자하기 힘든 일은 함께 하고 여럿이 해야 될 일을 혼자서도 할 수 있을 때는 순번을 정해서 수눎으로써 자원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돈으로 거래되고, 돈이 있어야 먹고살고, 자식교육을 시키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다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돈이 부족한 사람들은 경관 좋은 땅과 비옥한 농토를 팔고, 그곳을 구입한 부자들은 레저시설이나 기업농장으로 바꾸기 때문에, 환경과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제주사람들이 제주자연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개발업자에게 헐값에 넘기는 것은 좋은 사례이다.

지역통화는 수눌음과 같이 현금 없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거래 시스템이다. 지역통화를 이용하여 서로의 재능과 재화를 교환하게 되면 생활비와 교육비가 줄고, 노인과 복지문제 등이 해결되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결속력과 자긍심이 강해지고, 그동안 시장경제 체제에서 배제되던 중고나 파치도 거래됨으로써 자원절약과 환경보전에 기여하며, 인문학도나 예술가도 일거리가 생기고 대중들도 문화예술을 향유함으로써 삶의 질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3) 자립공존 사회

▲ 제주의 생태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을 때 삶은 풍요롭고 아름다워 질 것이다.



옛 제주사람들은 혼자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함께 함을 보탰다. 농경사회의 필수품이었던 연자매를 관리하기 위한 연자매계, 장례나 결혼 등의 대소사를 치를 때 사용하거나 자녀를 키울 때 사용하는 재화나 물품들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계들은 개인이 관리하기 힘든 것들을 공동소유를 통해 관리하면서 친목까지 도모하던 지혜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그러한 공유경제 시스템은 개인주의 팽배로 인한 공동체 위기를 극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비를 확대함으로써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환경과 생태계를 지키는데도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농촌에서 혼자서 구입하고 운영하기에는 어려운 농업기계를 여럿이 공유한다면, 불필요한 가계지출을 줄이면서 이웃간에 친목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엔 집집마다 자동차를 여러 대를 구입한다. 우리는 자동차를 사용가능한 시간 중 평균 3%만 사용한다. 이는 매우 비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반환경적이기도 하다. 도서관의 책들처럼 자동차, 가전제품, 의복, 아동도서, 장난감 등을 여럿이 공유한다면 가정경제뿐만 아니라 지구환경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4) 비움경제 사회

모든 생명체는 호흡하고, 영양을 섭취하고 배설하면서 살아간다. 시공간적 틈새가 없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생명체가 살아가려면 빈틈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채움’ 못지않게 ‘비움’이 필요하며, ‘인위적인 것’ 못지않게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필요하다. ‘비움’은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번잡한 도시에서 바쁘게 채우는 생활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쉬면서 비워내고 덜어내는 기회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또 다른 경제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 ‘빠름, 인위, 인공, 일’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휘황찬란한 인위적 시설을 중심에 놓는 경제를 ‘채움경제’라 한다면, ‘느림, 무위, 자연, 쉼’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자연 저 그대로에 바탕을 둔 경제를 ‘비움경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나치게 ‘채움경제’ 위주를 강조하고 ‘비움경제’를 도외시 해왔다.  하지만 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채움경제’ 못지않게 ‘비움경제’가 필요하다. 여행자들이 제주를 찾는 대부분의 이유는 빠름과 채움과 넘침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천천히 쉬면서 덜어내고 비워내기 위해서이다. 노동보다는 여가를, 소비보다는 체험을 중시하는 오늘날엔 잘 보전된 자연과 독특한 문화야말로 ‘비움경제’를 위한 가장 좋은 자원이다.

◇맺는 말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지역적인 것이 문자 그대로 세계적인 것으로 되려면, 독특하면서도 동시에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제주의 전통문화도 세계적인 것으로 되려면 독특함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제주의 전통문화 속에서 보편적 가치로 취할 수 있는 부분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생태적 지혜이다.

제주는 제주다울 때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울 것이다. 넘쳐나는 자동차, 사통팔달 도로, 높게 치솟는 건물은 제주답지 않다. 제주다움을 지키는 것은 제주사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요, 글로컬 시대의 가장 큰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가 대규모로 개발되고 개방화되면서 제주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개발도 개방도 최종 목표는 제주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

체험산업 시대에는 빼어난 제주자연을 잘 보전하고, 아직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독특한 제주문화의 가치를 밝히고 널리 알리는 것은 그 어떤 개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제주는 꽉 채워진 인공도시 속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제주는 꽉 찼던 스트레스를 비워내는 쉼터가 되어야 한다. 제주에서 비어 있는 곳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곳이다. 세계적인 제주자연이 잘 보전되고 제주의 생태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을 때 제주인의 삶은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제주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가 되고 세계인의 마음의 고향으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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