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주는 위로 <6> 산신제단 산천단길
(상)목사 이약동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

산천단에 위치한 이약동 선생의 한라산신단 기적비.

3월에 들어선 제주는 그 초입에서 꼭 한 번은 겨울의 어느 차가운 날을 소환한다. 아직은 그렇게 나른해할 때가 아니라고, 하루 자고 일어나면 이만큼씩 자라난 고사리를 캐려면 한 번쯤은 옷깃을 여며야 한다고 말이다. 옷깃을 여미고 제주대 후문을 나서면 516도로로 나가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만날 수 있다. 길지 않은 이 2차선 도로 한 차선은 학기 중은 물론, 방학 때조차도 상가를 따라 주차된 차들 차지다. 오르막길인 탓이겠지만, 산으로 가는 길은 본래 오르막길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저 높은 천상도, 저 밑의 지하도 아닌 평평한 땅, 지상이다. 그 균질한 공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르막이거나 내리막일 수밖에 없다. 신화에서 이 길은 일상적인 공간과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는 출구다. 특히 오르막은 세계가 창조될 때 우리가 왔던 곳, 곧 천상으로 가는 출구다. 천상으로 되돌아가는 곳에는 산천단 곰솔 같은 우주의 기둥이 있다.

◇ 산천제를 지내는 제단

제주도의 남북을 이어주는 가장 오래된 도로는 1973년 개통된 1100도로보다 4년 앞서 개통된 516도로다. 이 도로의 공식적인 이름은 11번 국도였다가, 지금은 1131번 지방도로로 바뀌었는데, 516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1962년부터 7년 6개월에 걸쳐 기존도로를 일부 확장하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후에 얻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차량으로 5시간 걸리던 거리가 한 시간 남짓으로 줄었다지만, 기존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정치적인 색깔이 농후하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시청에서 인다마을을 지나 제주대학로 사거리를 지나서 왕복 6차선 도로를 타고 한라산으로 올라가다보면 왕복 3차선으로 갑자기 줄어드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 오른 쪽으로 난 좁은 길에 들어서면 ‘아늑하다’고 해도 좋은 평지에서 여덟 그루의 곰솔과 만나게 된다. 곰솔 주변으로 쳐진 울타리 너머에는 ‘목사(牧使) 이약동선생(李約東先生) 한라산신단(漢拏山神壇) 기적비(紀蹟碑)’가 있고, 그 안쪽으로 한라산신제단이 놓여 있다.

한라산신제단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6호이다. 한라산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지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동원된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인명피해가 속출하거나 궂은 날씨에 등반할 수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1470년[成宗 원년] 이약동 목사가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면서 산천단(山川壇)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관광안내지도나 표지판 등에서는 산천단(山天壇)이나 산천단(山泉壇)으로 잘못 표기되기도 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또는 ‘산에서 나는 물이 좋은 제단’이라는 점에 착안한 표기들이다. 실제로 산천단은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 토산의 거슨새미와 노단 새미의 물, 호근의 지장물, 덕수의 물통 등과 함께 중산간 마을에서 솟아나는 큰물로 유명했다. 이들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던 곳으로, 지금도 가뭄이 들면 산천단에서는 기우제가 봉행된다. 하지만 산천단은 ‘산천제(山川祭)를 지내는 제단’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다.

◇측은해 하는 마음을 만나 산허리로 내려온 거룩한 공간

산천제란 본래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국가제례다. 일월산천(日月山川) 등의 자연에 신(神)이 깃들어 있다는 자연신신앙이 반영된 제사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때에는 “삼산오악(三山五嶽)과 명산대천을 나누어서 크고 작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 제례가 고려시대에 전승되는데, <고려사>에서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명산대천과 동신을 섬기기 위함이다.”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도교 제례 행사인 초례(醮禮)를 위해서도 대궐 뜰에서 산과 함께 하천에도 제사를 드린 일이 있다. 이 초례는 눈과 비, 재앙과 복이 오거나 그치기를 기우(祈雨)ㆍ기설(祈雪)ㆍ기양(祈禳)ㆍ기곡(祈穀)ㆍ기복(祈福) 등을 위해서 올려졌다. 조선은 유교를 표방했지만, 이런 전통이 이어졌다. <태종실록>만 해도 “산천단(山川壇) 및 불우ㆍ신사(神祠)에 기청했다.”라는 기록을 비롯하여 다양한 제의의 기록이 등장한다.

18세기 중후반에 간행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서는 “소림사(小林祠)는 한라산신(漢拏山神)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 사(祠)는 한라산 아래인, 제주목 남쪽 16리에 있었다. … 처음에는 백록담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겨울에 만약 눈이 심하게 와서 올라가지 못하면 산 중턱에서 제사 지냈다. 그 뒤 사(祠)는 소림과원(小林果園) 가운데로 옮겼다.”고 하였다. 이때가 이약동목사가 부임한 1470년이라고 하는데, <증보탐라지>보다 앞선 1653년에 간행된 <탐라지(耽羅誌)>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한편, 18세기 후반에 간행된 <제주읍지>에는 등장하는데, 이때 이후로 산천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3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55세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3년을 재임하다 돌아간 유학자의 측은해 하는 마음이 산정상의 제단을 산허리로 내려오게 만들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