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법칙> 쇼펜하우어 지음,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 펴냄

“토론술은 진리를 찾는데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첫 장에 쓰인 글귀이다. 이 책은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고상하고 점잖은 토론 지침서가 아니다. 그의 첫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궤변론자들이 토론을 통해 어떻게 대중을 현혹하는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대선후보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면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미발표 작이었던 이 책은 19세기에 집필됐지만, 21세기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나온 책이라는 착각까지 주기에 충분하다.

책 중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토론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을 자극하여 화나게 만들어라. 왜냐하면 화가 난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부당한 짓을 하거나 그의 말에 트집을 잡으면 된다. 다시 말해 뻔뻔스러워져야 한다.”

이 책은 철저하게 쇼펜하우어 적이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정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염세주의이다. 1788년 독일의 단찌히에서 태어난 쇼펜하우어는 1811-1813년 베를린대학교를 다녔고, 1813년 여름 동안에 루돌슈타트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여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특히 자연과학)와 집필에 몰두한 채 28년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생활 했으며, 말년에는 저작 대부분에 마무리 손질을 하다가 1860년 생을 마감했다.

쇼펜하우어는 <토론의 법칙>에서 확대해석하기, 딴청 부리기, 말꼬리 잡기, 인신공격하기 등등 논쟁과 토론에서 등장하는 갖가지 트릭들을 낱낱이 들춰내 보여준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의 진가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 못지않게 잔꾀에 능한 상대방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라는 방어적 성격을 강조하는 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즉 오직 이기기 위한 전술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그런 전투적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라는 생존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통해 논쟁과 토론에서 쏟아져 나오는 간계의 실체를 속속들이 들춰냄으로써 누구나 실제의 논쟁과 토론에서 부정직한 기만책들을 금방 알아차리고 나아가 그것들을 물리치게 되기를 소원했다.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펼칠 때, 우리는 그의 주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안되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라도, 그가 이전에 주장했거나 시인했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지, 혹은 그가 칭송하고 인정하는 학파나 종파의 원칙, 또는 이 종파의 신봉자들의 행동, 심지어 진실하지 못한 사이비 추종자들의 행동이나 그런 주장을 펴는 상대방의 행동과 모순되지 않는지의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가 자살을 옹호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러면 왜 당신은 목을 매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하면 된다. 또는 그가 “베를린은 잠깐 머물기에는 불편한 도시입니다”라고 주장한다면, 곧바로 우리는 “그러면 왜 당신은 첫 기차라도 잡아타고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라고 맞받아치면 된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어쨌든 상대방의 주장을 저지할 수 있는 트집거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대체 어떤 이유로 논쟁과 토론에 대한 책을 썼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사실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내게 된 데는 헤겔과의 악연이 한몫하고 있다. 헤겔과의 인연은 베를린대학 재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류였던 헤겔의 철학을 멸시하던 차에 베를린대학 강사로 초빙된 쇼펜하우어는 의식적으로 헤겔과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개설했으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 이후 30년 가까이 은둔한 후 쓸쓸히 생을 마치기 전까지 쇼펜하우어는 평생에 걸쳐 헤겔이 현실성 없는 책상철학자, 그리고 뛰어난 수사학으로 인류를 현혹하는 소피스트라고 비난했다. 이 책은 그런 소피스트들의 교묘한 수사학에 대적하기 위해 고안된, 쇼펜하우어로서는 그야말로 절치부심한 끝에 탄생시킨 결과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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