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이 공론장서 경쟁하는 것이 기본…
민주주의를 염원하면서도 이를 허물어뜨리는 ‘무의식’을 자기비판해야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우리사회를 규정짓는 기본이념인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특정한 이념을 덧씌워 정의한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의 소치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유’의 의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이 공론의 장에서 경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가능한 정치적 힘과 경제적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토론을 통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언제든 토론을 통해 ‘나의 생각’의 한계가 드러날 때 과감하게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참이나 미달이다.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으로 ‘다른’ 생각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모순되게도 ‘자유’라는 개념은 민주주의에 특정한 수식어를 붙여 그것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것과 공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여러’ 민주주의가 함께 경쟁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지난한 투쟁 과정에서 얻어진 민주주의는 권력의 중심을 비워두고 다양한 생각과 입장이 경쟁하는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운 ‘과정’이다. 소란과 혼란의 과정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독단보다 모아진 여러 사람의 생각이 훨씬 진실에 가깝고 덜 허위적이라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실천의 원리’라는 것이 민주주의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민주주의는 여러 사람의 창의적 생각을 끌어내는 것이기에 그 자체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형될 뿐 아니라 그것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사회도 멈춰 서지 않게 한다. 이러한 변형은 더 많은 사회적 집단의 정체성이 인정받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서구사회에서조차,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소수 기득권 세력의 ‘통치’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생물학 분야의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편견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 흑인들의 지적능력은 백인에 비해 열등하며, 그래서 식민통치는 계몽과 지도라는 생각조차 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었다.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노동자, 여성, 그리고 비서구사회의 투쟁을 통해 이러한 편견을 깨트리는 지속적인 운동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지난해 말에서 올 초까지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이 염원했던 것은 ‘다름’을 기꺼이 인정하고 나의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민주주의를 향한 커다란 걸음이었다. 그런데 광장의 촛불이 사라지고 유세차량과 플래카드가 그것을 대체한 지금 우리는 또 다시 민주주의의 결핍을 목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유력정당의 대표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동성애의 인정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어떤 교과서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인권에 앞선다고 말하지 않는다.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여성과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했던, 지금은 완전한 오류로 판명된 낡은 생각을 여전히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혹시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조차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비합리적’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면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는 우리들 자신의 ‘무의식’을 자기 비판해야할 때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들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들 안의 ‘비민주주의’를 발본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체성 인정을 위한 투쟁에 공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언제든 민주주의의 적으로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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