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에 제주로 이사를 온 나는 그 전까지 제주 4.3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후에 4.3 평화 공원을 방문하고, 학교에서 했던 백일장에 참가한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제주대에 입학하며 4.3에 관심이 생겼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5.10총선거에 반대하는 제주의 민중 항쟁과 그에 대한 미군정과 극우 단체의 유혈진압 사건’ 정도로 배운 4.3은 그리 가볍게 지나칠 일은 아니었다.

4월 2일 4.3 평화 기념관에 다녀왔다. 들어가자마자 첫 전시물 백비가 나를 사로잡았다. 많은 희생자의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지만 희생자들은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어떤 글도 새겨지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곧이어 들어간 전시실에서는 4.3의 진행 과정을 알 수 있었다.

1947년 3.1절 기념식,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이게 된다. 이에 군중은 경찰에 항의했고,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해 시위대에게 발포했다. 사건의 전모를 모른 미군정은 잘못은 시인하면서도 ‘불가피한 발포’였다며 모순적 정당방위를 주장했고 이러한 주장에 민심은 들끓었다. 남로당은 이를 놓치지 않고 조직적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 5.10 총선 저지를 위해 남로당 350명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급습하며 4.3이 시작됐다.

전시실을 관람하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초토화 작전’, 일명 ‘레드 헌트’였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이승만 대통령의 불법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해안선 반경 5km 이외 거주자는 총살한다는 포고령이 발포됐다. 산간 주민들은 해변으로 강제 이주됐고 직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다. 남은 자들이 학살당했다.

1960년, 이 비극의 실체를 밝히고자 4.3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제주신보 (現 제주일보) 전무와 제주대 학보사 등 진상규명 주도 세력이 구속되며 오랜 탄압이 지속됐다. 그렇게 31년간의 진상규명 운동 끝에 1991년 ‘4.3 위령제’가 시작됐고 1999년 ‘4.3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 후 2003년 故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고 2005년 제주도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며 인식이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도민이 아닌 이들의 대다수는 4.3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이념이 부른 무차별 학살로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4.3.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제주 사람들만의 아픔일 뿐이다. 4.3은 반드시 제대로 알고 반성하고 책임져야할 역사이며 결코 어떠한 정치적, 혹은 지역적 논리에 의해 돌아봐서는 안 될 보편적 인권에 관한 문제이다. 그 동안 침묵했다면, 이제는 소리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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