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진영(문화조형디자인학부 2

처음 자퇴를 한다고 했을 때 다희는 무척 놀란 듯 보였고 지수는 무덤덤했다. 지수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이유를 묻는 다희와 달리 지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지수의 무덤덤함에 더 마음이 놓였다.

다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3학년이 된 후 바쁘다며 소식이 뜸한 지수와 달리 다희와는 자주 연락할 수 있었다. 용건은 전과 다르지 않게 하소연이 주를 이뤘다. 집에 와봤더니 아무도 없이 언니 데리고 병원 다녀온다는 쪽지 한 장뿐이었어. 냄비에 물을 받는 소리와 다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섞여 작은 소음이 일었다. 휴대전화의 볼륨을 줄이려 귀를 잠시 떼어내는 중에도 다희는 속사포처럼 짜증을 뱉어냈다. 소심한 성격의 다희가 이같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홀로 있을 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참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면 혼자 라면을 먹으며 눈물을 글썽일 다희가 걱정되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자퇴 후 일과는 아주 단순했다. 글 아니면 휴식. 물론 여기서 이 글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쓰는 게 아닌 걱정과 불안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드라마를 보다가도 짜증이 났고 잠을 자려 누우면 문득 불안했다.

우리도 내년이면 열아홉이야. 죽음의 고3이지. 급식실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다희가 말했다. 짜증 섞인 말투와 달리 다희의 시선은 제육볶음에 머물러 있었다. 아홉수라는 말은 분명 열아홉 살에 가장 부합하는 단어지. 딴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던 지수가 거들었다. 그때는 스치듯 넘겼던 지수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일정이 빽빽이 적힌 달력과 한쪽 벽면을 차지한 계획표만이 어느 하나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안에서 유일한 움직임의 흔적이었다. 나조차 가만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은 지 2시간째였다. 벌컥.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방문이 열렸다. 미리 컴퓨터 화면을 드라마에서 한글창으로 바꿔둔 나는 태연하게 방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엄마의 귀가였다. 아직도 글이 잘 안 써지니 큰일이네. 그래도 엄만 우리 딸 믿어, 알지? 글자 하나 없이 새하얀 화면을 심각하게 바라보다 엄마는 이내 밝은 얼굴로 응원 아닌 응원을 던져 놓고 방을 나섰다. 지긋지긋했다. 엄마의 응원에는 자신의 바람에서 엇나간 딸을 어떻게든 되돌려 놓으려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홧김에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곤 바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다시는 예전처럼 엄마의 기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다희의 전화였다. 벨소리를 무시하고 애써 잠을 청했다. 도저히 다희의 이야기를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다음날, 다희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이제 학교에서 매일 만날 수도 없으니 괜한 걱정이 스쳤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은 지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에 맞춰 전화 한 건데, 괜찮지? 사정은 이랬다. 다희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늘 그랬듯이 하소연을 늘어놓던 다희를 지수가 차갑게 대했다는 것이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무심했을지라도 다희와 나에게만큼은 살가웠던 지수였다. 나라도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걔 또 냅다 먹고만 있는 거 아닐지 걱정이다. 나는 자책하듯 말했다. 지수는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수업 종이 울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째였다. 무심하게 굴던 지수도 무단결석까지 한 다희가 걱정되었는지 바로 다음 날 연락을 해왔다. 지수가 선생님을 통해 다희의 집 주소를 알아왔다. 그제야 내가 여태 다희의 집 주소조차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희의 집으로 가는 길은 낯섦의 연속이었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곳곳의 쓰레기들, 악취가 풍기는 좁은 골목. 인적이 드물게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한기가 가득했다. 지수와 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자줏빛의 벽돌이 여기저기 으스러진 외관의 작은 주택이었다. 그곳의 주택들은 모두 줄줄이 이어져 집들 간의 간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주택의 측면에 위태롭게 붙어있는 나무로 된 계단이 눈길을 끌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거덕하는 소리가 울릴 것만 같았다. 계단의 끝에 작은 쇠문이 보였다. 성인 한 명이 간신히 드나들만한 작은 크기의 문이었다.

수많은 주택 가운데 정확히 다희네 집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주변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참다못한 지수가 휴대 전화를 꺼냈지만, 다희가 갑자기 전화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무언가로 가득 찬 편의점 비닐봉지를 양손에 든 채 나무 계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드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누가 봐도 굽은 등의 다희였다. 눈치 빠른 지수도 몰라봤을 리 없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쇠문이 닫히고 한참 동안 커다란 후드티로도 가릴 수 없던 다희의 기운 없는 뒷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다. 지수가 먼저 발걸음을 돌렸고 그 뒤를 무거운 발걸음의 내가 따랐다.

며칠 뒤 지수에게 다희가 다시 등교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선뜻 다희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희가 쏟아내는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것은 예전처럼 잠자코 듣고만 있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꾸만 허름한 주택의 쇠문과 계단을 올라가던 다희의 뒷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벌써 여덟 번째다. 공모는 고사하고 어떻게든 하루 안에 끝이 나는 백일장에 기대를 걸었지만 예상대로였다. 제대로 완성조차 못한 글을 내고 나오는 경험이란 상상보다 훨씬 끔찍했다. 오늘은 좀 괜찮을 것 같아? 2시간 내내 입구에서 기다린 엄마는 조심스럽게 한편으론 단호하게 물어왔다. 아무 말도 없는 나를 보며 엄마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어졌다 곧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지루할 만큼 익숙한 순서였다. 시상식 행사를 구경하고 가자는 엄마를 지하철역으로 이끌었다. 벌써 한여름의 더위가 시작될 것 같은 끈적하고 불쾌한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짜증을 유발했다.

여전히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박아 글자를 만들던 손가락들도 사이사이 때가 낀 자판 위에 힘없이 널브러진 지 오래였다. 언제부턴가 나만의 소설을 쓰고 싶었던 꿈은 막연히 뭐라도 써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여자의 이번 캐리어 색은 빨간색이다. 흰색은 프랑스, 파란색은 영국, 노란색은 스페인, 색색의 캐리어 모두 짐을 싸둔 상태 그대로다. 여자는 방한 쪽 벽면에 도배되어 있는 여행지 사진을 잠시 훑어보다 커다란 세계지도에서 스위스를 찾아내 별표를 그렸다. 스위스 여행을 위해 새로 장만한 물건들이 잔뜩 널브러진 방바닥 한가운데 앉아 여자는 만족을 머금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분주히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뭔가 중요한 것이 떠오른 듯 노트북 앞으로 향했다. 에델님이 스위스 패스는 필수라고 했는데, 블로그에 다시 들어가 봐야겠다. 열중한 그녀의 등 뒤로 여행 가방들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여자의 스위스 여행도 성사되지 않을 거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흰색 바탕에 멈춰진 커서가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써진 문장은 기뻐할 새도 없이 고장이라도 난 듯 금세 정지 상태로 돌아왔다. 여자에게 회피란 여행이 아닌 짐을 싸기에 그치는 것이었다. 매번 여자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글이 써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자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다 해도 이번에는 결코 중간에 그만둘 수 없었다. 매번 포기를 종용하는 답답한 성격을 고쳐보려 했지만 오랜 시간 흡수된 나쁜 습성이 그렇듯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에는 허공에 떠다니는 시간을 주체할 자신이 없었다. 문득 지수의 무덤덤함이 그리웠다.
뜬금없이, 아주 갑작스레 지수가 입시 전쟁터를 떠났다. 봄과 여름의 모호한 경계에 선 5월쯤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다희에게 전해들은 소식, 아니 선언이었다. 요즘 학교 분위기 완전 뒤숭숭하거든. 특목고 취소된다 안 된다, 또 말 나와서 아주 떠들썩하다니까. 여기에 지수가 대학 안 간다는 거까지 알면 학교 난리도 아닐 거야. 다희는 걱정되지만 흥미롭단 듯 말했다. 다희도 아닌 지수였다. 웬만큼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인다는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매번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던 지수. 다른 누구도 아닌 지수의 대담한 결정이 믿기지 않게 놀라웠다.

집 앞으로 불쑥 지수가 찾아왔다. 초저녁 시간대라 원래대로라면 지수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어야 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던 지수가 자신에게 향하는 발걸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비어있는 지수의 옆 그네에 앉았다. 지수가 말없이 왼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 하나를 건넸다.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조심스레 맥주캔을 건네받았다. 몹시 낯설었다. 집 앞을 찾아온다든가, 맥주를 마시는 행동들은 평소 지수에게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맥주 같은 시시한 일탈이 아니야.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했으니까. 가만히 한 손에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던 지수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나의 자퇴 결정을 듣고도 아무 말 않고 믿어주었던 지수처럼 나 또한 묵묵히 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뭘 또 그렇게까지 심각해. 난 진짜 홀가분한데. 다소 경직된 내 얼굴을 빤히 지켜보던 지수가 그네의 한쪽을 툭 건드리곤 웃어 보였다. 지수라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으리란 믿음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한편으론 부러웠다. 늘 잘못된 건 아닌지, 틀렸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회피만 하던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멋진 결심이었다. 지수가 맥주캔을 따서 마시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자꾸만 나와 소설 속 여자의 불안이 맞물려 떠다녔다. 지수는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처음 보는 말간 미소를 남긴 뒤 발걸음을 돌렸다.

글쎄 내가 전교등수가 5등이나 올랐는데 아무도 모르는 거 있지. 하긴, 뭐 언젠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냐고. 다희는 여전히 내게 자주 전화를 걸어 끊임없이 말을 했다. 일주일 동안의 연락 두절은 없었던 일인 듯 다희는 변함없이 아무렇지 않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늘 그랬듯이 가만히 다희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아마 언니 병원비 때문에 내가 대학에 붙어도 난감해할 게 뻔해. 전화를 끊기 전 한숨 섞인 목소리로 들릴 듯 말듯 다희가 말했다. 우리 엄마는 다희의 엄마와 달리 항상 너무 많을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낸 공모전의 결과도, 넘쳐나는 백일장 일정도, 다른 사람에게 향한 아빠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도, 엄마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아냈다.

아빠가 떠난 후 엄마는 항상 분주했다. 아마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아질 거란 걸 이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소풍 때마다 분식집 김밥이 엄마가 직접 싼 김밥을 대신했고, 학교 행사마다 엄마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못내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계속해서 몸집을 부풀려갔다.

너는 늘 알아서 잘하니까. 엄만 우리 딸만 믿고 산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내게 해오던 말이다. 입막음 같은 엄마의 말에 매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이야기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도로 집어넣어야 했다. 지금껏 엄마는 내게 더없이 친절하고 자상했지만 단 한 번도 내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마음 안에 곯아버린 말들이 부패해 자주 가슴 한쪽이 쓰리듯 아팠다.

몇 번이나 돌려본 드라마를 멍한 눈으로 응시하다 이내 지루해져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내내 모른 척 외면했던 것들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 속에서 여전히 여자는 짐을 싸고 있었다. 여행 블로그들을 살피며 미리 스위스 곳곳을 여행하고 있을 여자를 떠올리자 또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불면의 밤 속엔 항상 불안이 존재했다.

안개처럼 뿌연 구름이 걷히자 뾰족하게 솟은 마테호른의 꼭대기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꿈속에서 본 마테호른은 블로그나 영상을 통해 본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얼룩덜룩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주위는 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눈부신 설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현실이 아님을 의심했던 것도 같다. 어느 하나 건드리고 싶지 않은 완벽한 경관에 조바심이 났다. 케이블카와 열차를 타고 내려가며 마주한 창밖의 푸른 절경과 빨간 캐리어를 끌며 걷는 아기자기한 체르마트의 거리, 골목골목 따뜻한 느낌의 목조 건물, 치즈 퐁뒤가 유명한 음식점까지. 여행 블로그에 나와 있던 일정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은 무엇보다 완벽했다. 아름다운 스위스의 풍경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는 건 좁은 방안에서 사진을 보며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굉장한 일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체르마트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등학교였다. 예전엔 수없이 열어봤던 교실 문인데 손에 닿는 차가운 촉감이 낯설었다.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자 예상과 달리 교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이곳에는 하루종일 좁은 책상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아이들도, 그걸 지켜보는 따가운 눈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내 온몸이 둥둥 떠 있는 듯 이상하고도 깨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간밤에 꾼 꿈을 되새기며 휴대전화를 보니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꿨다고 하기에 너무 생생한 꿈속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체르마트 거리를 찬찬히 되짚어보다 문득 쓰다만 글에 꿈속 여행 이야기를 넣으면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 번의 노크 소리 후 방문이 열렸다. 늦은 시간까지 열심이네, 간식 먹고 해. 막 한글 파일을 켜고 컴퓨터 책상에 앉아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는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주스가 담긴 쟁반을 두고 방을 나섰다. 곧바로 거실 TV 소리가 줄어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내며 예민하게 반응했을 테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조금이라도 확신이 들었을 때 얼른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다.

떠다니는 장면들을 이야기로 담아내기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마음속의 불안은 항상 배가 되곤 했다. 이번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다. 오히려 뭔가를 써내지 못하더라도 홀가분하게 비워낸 느낌이었다. 꿈에서 여행을 떠난 사람은 나였을까, 여자였을까. 궁금했다. 과연 용기 있게 불안을 직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거실로 나오자 소파 위 온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는 엄마가 보였다. 아마도 나를 기다리다 잠들었을 것이다. 매일 피하려고만 했던 부담스러운 눈빛이 감긴 두 눈에 갇혀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고 불편한 자세로 잠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머리를 받치고 있는 엄마의 두 손에 푸른색의 핏줄이 울퉁불퉁 부어올랐다. 근래에 새로 시작한 설거지 아르바이트 때문이 틀림없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올라오기 시작한 머리에 짓눌려 빨갛게 변한 엄마의 손에 마음이 자꾸만 찔끔거렸다. 안방 장롱에서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 엄마에게 덮어준 뒤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희의 전화에 익숙하게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잠자코 기다렸다. 가만있어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게 분명했다. 글은 잘 써지고 있어? 평소보다 훨씬 담담한 말투로 다희가 물었다. 차분한 목소리의 다희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다희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내 상황을 묻는 것이 적응되지 않았다. 매일 제자리지 뭐. 당황스러움을 애써 숨긴 채 대답했다. 그냥, 넌 어떤지 궁금해서. 다희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다희는 강하게 부정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자 얼떨떨했다. 일일이 반응해주는 다희 덕에 신이나 어젯밤 꿈에서 본 장면들을 세세히 늘어놓았다. 다희에게 많은 말들을 건넨 것도, 다희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어떤 때보다도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듯 꺼내놓고 나니 한결 가벼웠다. 그동안 다희가 전화로 끊임없이 내게 이야기를 해왔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 상황을 인지하고 나니 문득 평소와 달랐던 다희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많은 말들을 뱉어낸 적이 있을까. 지금껏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가장 어려웠다. 힘겹게 자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다희와 지수에게 고민 한 번 얘기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늘 혼자 감당하며 숨기는 것에 더 익숙했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듣는 일은 내 몫이 되어버렸고, 스스로를 방어하려 진심으로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나는 소설에서도 진실한 감정을 숨긴 채 거짓으로 문장을 써내려 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가 자신의 상처를 숨긴 채 나를 향해 보이던 웃음도 거짓이 아니었을까.

뭘 그렇게까지 놀라고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 다희는 홍조를 띤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다희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있었다. 놀란 맘을 숨기지 못하고 여태 서 있는 내게 다희가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어쩐지 요즘 전화가 뜸하더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갑작스러운 다희의 변화가 한편으론 걱정되었다. 그냥, 이제 미련하게 딴사람들 관심만 바라면서 나를 망치긴 싫어. 그동안 정작 나조차도 스스로한테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아. 다희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던 다희라도 진짜 상처를 꺼내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다희의 마음만은 분명하게 와 닿았다. 이젠 나를 위한 일을 해볼 거야. 당당하게 다짐하듯 말하는 다희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다희가 부끄러워하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다희에게 들은 학교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교육청에서 전부터 우려했던 특수목적고 지정 취소 결정이 내려져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해 외고에 입학한 학생들 모두가 의욕상실 상태였고, 몇몇 학부모들은 교육청 앞에서 시위까지 벌이고 있어 학교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지수네 엄마가 학부모 대표로 교육청시위에 완전히 앞장서고 있다니까. 쌤들도 나서고, 암튼 학교 분위기 장난 아니야. 다희가 조심스레 말을 이으려 할 때 지수가 막 카페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수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희와 내게 번갈아 시선을 맞췄다. 변함없는 무덤덤함이었지만 어쩐지 고단함이 묻어나는 눈길이었다.

이제 와 말이지만 넌 정말 대담해. 성적도 항상 상위 1% 안에 들던 네가 입시를 포기할 줄이야. 지금 우리 나이엔 대학 입시만큼 중요한 것도 없잖아. 솔직히 그게 전부라 해도 맞는 말이지, 뭐.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외고라는 네임벨류 지키려고 그 난리인 거고. 긴 정적을 깨고 다희가 말했다. 얼마 전 입시를 포기한 지수를 향한 말이었다. 그제야 유리창에서 시선을 거둔 지수는 뜬금없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9가 프랑스어로 뭔지 알아? neuf라고 ‘새로운’이란 뜻을 담고 있데. 그러니까 우리에게 열아홉은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나이일 뿐이야. 그게 대학이든 대학이 아니든.

집에 오자마자 방으로 향했다. 온종일 돌아다녔던 피로감이 몰려왔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침대에 눕자 천장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갑갑했다. 예상과 달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지수가 했던 마지막 말이 자꾸만 천장을 떠다니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빨간색 캐리어에 차곡차곡 짐이 쌓였다. 여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듯 캐리어의 지퍼를 잠갔다. 여자가 온갖 짐들로 들어찬 캐리어를 능숙하게 들어 줄줄이 놓인 여행 가방 옆으로 옮겼다. 무의식적으로 이번 여행도 떠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는지 여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색색의 캐리어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자가 책상 위 휴대 전화를 들었다. 저기, 에델님이시죠. 블로그 보고 연락드렸어요. 궁금한 거 있으면 전화로 물어도 된다고 써 있길래. 여자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스위스는 갈 때 얼마나 걸릴...까요?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여행의 현실적인 궁금증을 가져보는 것도 여자에겐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커다란 용기였다.

여전히 소설은 마무리되지 못하고 그 자리였다.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찬 방안을 나와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 창틈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와 콧등의 땀을 말렸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글은 잘 써지니? 베란다 빨래건조대에 빨랫감을 널고 있던 엄마가 물었다. 아니. 평소같이 대충 얼버무리려 한다는 게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엄마의 반응이 걱정돼 눈치를 살폈다. 어쩔 수 없지, 천천히 써봐. 예상과 다르게 엄마는 담담하게 말하곤 계속해서 빨래를 널었다. 문득 그동안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거라 여겼던 게 오해가 아닐까 생각했다. 도시의 소음이 찬바람을 타고 방충망을 넘어오고 있었다.

바람을 쐬고 나니 어지럽던 머리가 한결 나아졌다. 또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왜 온종일 불안에 매여 떠나지도 못하고 짐 싸기만 반복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이상한 소설만 쓰게 되는 걸까. 지난밤 꿈속에서 떠난 스위스 여행이 떠올랐다. 한동안은 꿈속 여행을 떠난 사람이 여자인지, 나인지 무척 헷갈렸다. 돌이켜 보니 그 사람은 여자이기도, 나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 속 여자는 어딘지 나와 닮아있었다. 어쩌면 여자의 상처와 내 상처가 연장선에서 서로 맞닿는 부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여자와 나, 둘 다 오랫동안 회피하기만 했던 불안과 상처를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늦은 저녁 우리 집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 준비가 한창인 엄마를 대신해 현관문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곳엔 지수가 서 있었다. 지수는 다짜고짜 우리 집에서 하루만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평소 부탁 같은 건 일절 하지 않는 지수였기에 무슨 일이 있으리라 짐작이 되어 바로 집안으로 들였다. 여태 집으로 친구 한번 데려온 적 없던 내게 직접 친구가 찾아오자 엄마는 흔쾌히 지수에게 자고 가도 된다 허락해주었다.

침대를 양보하자 지수는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집에 온 손님을 바닥에 재울 수 없어 거의 반강제로 지수를 내 침대에 눕게 하고는 침대 옆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침대가 생기고 나서는 처음 누워보는 방바닥이었다. 조금 춥고 딱딱했지만, 바닥에 등을 맞대고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불을 끄려 일어나며 슬쩍 지수에게 물었다. 그새 잠들었는지 지수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도 통 잠이 오지 않았다. 나 집 나왔어. 잠든 줄 알았던 지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숨죽여 말했다. 지수의 안색을 살피려 고개를 최대한 들어봤지만, 침대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수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만 잠자코 기다렸다. 사실 엄마가 입시 포기한 거 얼마 전에 아셨거든. 예전만큼 성적이 안 나오니까 담임선생님이 전화했나봐. 응. 지수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조심스레 대답했다. 지수가 작게 얘기하니 어쩐지 나도 조용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엄마는 오롯이 너를 위해 교육청에 시위하러 다니느라 이 고생인데 도대체 왜 이러냐고 타이르다가, 또 다른 날엔 제발 정신 차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애원하다가. 요 며칠 매일 그랬지 뭐. 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래서 집 나온 거야? 나도 모르는 새 목소리가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그냥, 지겨워서. 머리 좀 식히고 들어가려고. 어차피 아침부터 교육청 가느라 나 없어진 줄도 모를 거야. 잘 자라. 지수가 벽 쪽으로 등을 돌려 누웠다. 얇은 티 하나만 걸친 지수의 등이 유난히 추워 보였다.

어디로 가는 거야? 지수가 물었다. 전철이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때마침 직접 전철역으로 오겠다던 다희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희를 향해 뛰라고 손짓하며 장난스레 지수에게 답했다. 가보면 알아, 일단 타자. 우리 셋을 태운 전철은 한낮의 역을 빠져나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서울과 가까운 바다였다. 아무리 평일이라도 막 피서 철이 되어 벌써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워하던 지수도 오랜만에 본 바다에 들떴는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희가 모래 감촉을 느끼겠다며 신발을 벗고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금세 바닷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오후 내내 빨갛게 익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실컷 웃음을 터트렸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햇볕에 반짝이며 출렁이던 바닷물이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바닷물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내일 새벽까지 기다리다 일출 보면 진짜 멋있겠다. 다희가 신난다는 듯 말했다. 부모님께 말씀은 드리고 나온 거지? 나는 혹시나 하며 다희에게 물었다. 어차피 병원에 있어서 나 나온 줄도 모를 거야. 내가 머리를 살짝 쥐어박는 시늉을 하자 다희가 환하게 웃었다. 하, 이게 지금까지 내생의 제일 큰 일탈일 거야. 나는 약간의 비릿함이 섞인 시원한 바닷바람을 크게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좁은 베란다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하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았던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잠에서 깨니 사방이 어두웠다. 나는 지수에게 기대어 있었고, 다희는 내게 기대 잠들어 있었다. 여태 깨어있던 지수에게 시간을 물었다. 5시, 곧 일출 볼 수 있을 거야. 지수가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곤히 자고 있는 다희를 흔들어 깨웠다.

사실 나는 지수의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인, 9. 완성을 위한 마지막 하나. 행여 넘어질까, 흐트러질까, 망치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유난히 더디고 힘들게 느껴지는 시련의 수. 내게 열아홉이란 불안으로 가득한, 흔히들 아홉수라 부르는 나이에 불과했다. 모든 일의 종점은 대학일 뿐, 아무도 그 후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감히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나인은 불행의 징조가 아닌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성장통이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기라는 걸. 앞으로도 수많은 나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일출 시각이 임박하자 많은 사람이 바닷가로 모였다. 다희는 연신 하품을 내쉬었다. 곧 수평선 너머로 붉은빛이 조금씩 떠오르더니 점점 주위가 밝아졌다. 태양 빛에 눈이 부셔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섰다. 다희와 지수의 머리 위로 완벽한 구형의 태양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두 눈이 시렸다. 수많은 감정들이 솟구치는 아침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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