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을 걸을때 혼자인 것보다
사람이 있음이 더 무서워…
누군가 곁에 걷고 있음이
더 든든하게 느껴지길 소망해

내가 현재 거주하는 교직원아파트에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은 길고 곧게 난 숲길이다. 글로 표현하면 느낌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지만, 우리 학교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제대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학교 쪽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재작년 초가을, 처음 부임해온 날 그 길을 걸으며 설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밤에 숲길 모퉁이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장 보러 아랫마을 다녀오는 목가적인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한 주 동안은 그랬다.

첫 일요일, 마을로 내려가 볼 일을 보자 밤 9시가 넘었다. 정류장에 내렸더니 가로등도 꺼진 적막한 길이 터널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 다음날 마법사할머니 집으로 변해있듯, 밝을 때는 그리도 호젓하던 숲길이 어둠 속에서는 으슥한 외딴길로 바뀌었던 것이다. 캄캄한 수풀에서 서걱서걱 짐승의 발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는 밤늦게 버스를 탈 때면 한 정거장 더 가서 정문 앞에 내려, 캠퍼스 안쪽으로 되걸어오곤 하였다.

그러다 지난봄이었다. 출장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어서 들어가 쉬고픈 마음에 비 오는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제대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버튼을 눌렀다. 버스가 정차하자 등산복을 차려입은 어떤 분께서 서둘러 함께 내리셨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하시더니 내 쪽을 물끄러미 보셨다. 혹시 학교 정문인 줄 알고 내리신건가 싶어 “저쪽으로 5분만 더 걸으시면 정문 나옵니다”라 설명하려다 문득 의아했다. 얼핏 보기에 학생연배는 아니셨고, 설령 학생일지라도 시험기간도 아닌 일요일 오밤중에 학교가 목적지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더욱이 정문 앞에는 인가가 거의 없는데다 막차시간에 임박하였으니 환승하려는 것도 아닐 터였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나는 입을 벙긋하였다가 이내 다물고, 뒤돌아서서 빠르게 걸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우산을 꺼내어 쓸 정신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가 뒤따르는 발자국 소리가 안 들리기에 돌아보니, 그 분은 여전히 거기 선 채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계셨다. 멀리 보이는 실루엣에서 난감함이 배어났다. 혹시 지인의 집을 방문하신 것일까 하는 생각에 그제서야 미쳤다. 정류장 명칭은 ‘제대아파트’였으나 캄캄한 밤길에 멀리 아파트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혹은 버스를 반대방향으로 잘못 타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행인에게 무얼 좀 물어보려고 하였더니 눈을 마주치자마자 상대방이 뛰듯이 도망간 것일 테다. 얼마나 무안하셨을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대학원시절, 논문과제 마감이 다가올 때면 모교 대학 원도서관의 공부방에서 밤을 샜었다. 당시 도서관 로비에는 돌로 만든 공자 흉상이 있었는데, 자정이면 공자님이 스르륵 일어나 건물을 배회하며 눈에서 레이저 쏜다는 이른바 ‘대도관 괴담’이 전승되어 왔었다. 들으며 웃었지만, 막상 졸릴 때면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지는 듯하여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었다. 복도에 세워진 <정숙> 간판의 빨간 글자도 영화 ‘여고괴담’에서처럼 피로 변하여 흘러내릴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다 창밖에서 취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나 야간 건물공사하시는 분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안도감이 들곤 하였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소리를 지르면 ‘사람’이 듣고 달려오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 주위에서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라고 놀리곤 했다. 진정으로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제 나 역시 세상에 닳아서, 적요한 밤길을 걸을 때면 혼자인 것보다 사람이 있음이 더 무서워진 것일까.

여러 해 전부터 서울 광화문등지에서는 길 물으며 말을 걸어왔다가 ‘도를 아십니까’를 설파하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행인이 지리를 물으면 대부분 질색하여 피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짐 좀 들어달라는 할머니의 청을 받아 모퉁이를 돌자 잠복하고 있던 괴한이 습격하였더라는 류의 괴담도 돌면서, 행여 노상에서 누군가 도움을 청하거든 눈을 내려뜨고 그냥 지나치라는 조언도 들었다. 길을 가르쳐주거나 무거운 짐을 나누어드는 일마저 경계해야만 하는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고단한 일상으로써 일구어가는 내일의 이 땅이 “노래만큼 좋은 세상”까지는 못 되더라도, 캄캄한 숲길에서 혼자인 것보다는 누군가 곁에서 걷고 있음이 더 든든하게 여겨지는 곳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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