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정국 후 많은 게 바뀌어 머지않아 총장선거 다가와 리더에 대해 생각해볼 때

올해 필자가 소속된 대학의 가장 많이 달라진 모습은 회의가 다반사(茶飯事)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도 물론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회의가 많아지면서 현안에 대한 교수들의 관심과 참여가 지대해졌다. 학교 현안들에 대해 세세한 의견까지 수렴하다보니 식사하며 회의를 해야 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회의를 거치며 연구와 교육, 다양한 사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더 많은 정보 공유의 목소리가 확대되고 있다. 시민윤리와 인성을 전공 주제의 하나로 삼는 필자로서 이러한 소통과 교류를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촛불 정국 이후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하였다. 대통령 지지율을 보면 대다수가 환영하는 분위기인 듯하다. 지금은 익숙해지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 변화가 이전과의 다름을 절감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이다.

이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촛불 정국의 지난한 과정을 돌아보며 자신의 노력과 그로 인한 결과를 뿌듯하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한 사람의 리더가 바뀌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와 집단을 경험하면서, 공동체의 변화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요인이 리더임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과거 “현대사회와 윤리”라는 과목을 가르칠 때, “역사의 주체, 엘리트일까 민중일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엘리트라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리더들을, 민중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혁명과 민중항쟁들을 논거로 제시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강력한 리더십이, 후자의 경우는 대다수 민중들의 목소리가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이라는 주장이었다.

역사를 이끌어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과연 소수의 리더인지 아니면 다수의 민중인지 답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논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가?, ∼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큰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고민한 지점이 바로 “엘리트는 누가 되는가?”, “민중=엘리트는 불가능한가?”의 문제에 있었다.

우리의 사고는 역사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엘리트와 민중, 리더와 시민을 분리하여 선을 긋고 칸을 만들어온 역사인 듯하다. 권위와 탈(脫)권위, 촛불과 리더를 왜 구분하고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이러한 논리야말로 구시대적 지배의 논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시민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이래 이제 리더는 하나의 시민이자 시민들 속에 공존하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 사회이고 그런 시대인 것이다.

권위주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탈권위의 리더십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답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유교의 ‘정명(正名)’의 ‘∼답다’의 본질은 결코 권위주의적 권위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전통적으로도 제대로 된 권위는 인격적ㆍ능력적 권위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능력 있는 리더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는 데서 나오는, 대중들이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데서 나오는 제대로 된 권위인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11월에는 총장 선거가 있다. 위원회들을 구성하며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훌륭한 장(長)을 선출하는 데 있다. 각각의 위원회에서 이루어진 선거 방식, 비율, 공정성 등의 제반 논의는 학교를 가장 잘 이끌어갈 좋은 리더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이다.

우리에게는 인격적·능력적 권위를 갖추고 겸손하게 권위다운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리더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와 회의가 다반사가 된 소속 대학의 변화 시점에서, 인격과 능력을 갖춘 제대로 된 권위의 리더에 대해 생각해보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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