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중국 당(唐) 태종(太宗) 때 시작된 실록 편찬은 동시대사, 당대사의 편찬으로 전례 없는 역사 편찬의 경험을 구가하고 있었다. 한 가문에서 대대로 사관(史官)을 세습하면서 자료도 모으고 역사서도 만들었던 이전과 달리, 그 시기에는 ‘관청이나 사관에 모여서 관련자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역사를 편찬했다. 아직은 실록 편찬의 수준이 높지 못했던 그때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는 사관으로 『측천무후실록(則天武后實錄)』을 편찬하러 궁궐에 들어갔다가 경악하였다.

그가 본 것은 다음과 같은 현실이었다. 실력도 없는 사관들이 떼로 모여서 무엇을 남기고 버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붓만 빨고 있는 한심한 상황. 비밀로 해야 할 기록 내용도 저녁이 되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버리는 무책임한 상황. 원칙도 방향도 없이 사람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편찬 지침. 무엇보다도 체계적이지 못한 중앙과 지방의 기록 관리와 수집 정책. 이런 답답한 상황이 유지기로 하여금 『사통』을 쓰게 만들었다.

역사서술의 원칙을 세울 수 있는 책을 써서 남겨야만 그것을 보고 사관들이 공부할 것이고, 그렇게라도 해야 난삽한 역사 편찬의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력 없고 무책임하기만 한 관원들의 실록 편찬에 대한 실망과 문제의식에서 인류 최초의 ‘역사학개론서’ㆍ‘역사비평서’ㆍ‘역사이론서’라고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역사서 『사통』은 탄생할 수 있었다.

유지기는 특히 사료 수집의 비효율성과 무원칙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전한(前漢) 시대에는 지방과 각국의 보고서를 태사에게 먼저 올리고 부본은 승상에게 올렸습니다. 후한 시대에도 공경의 문서는 처음에 공부(公府)에 모았다가 나중에 난대(蘭台)로 올렸습니다. 이에 따라 사관이 편찬할 때 광범위한 자료를 갖추어 편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는 사관은 스스로 찾아다니며 물어보고 편찬해야 하고, 좌사나 우사도 천자의 기거주를 남기지 않으며, 공경과 백관들도 행장(行狀)을 거의 만들지 않습니다. 주(州)나 군(郡)에 가서 풍속을 찾아보아도 충분히 보고 들을 수 없고, 중앙관청에서 제도 변천을 조사해도 관련 기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대롱으로 하늘을 보듯 역사서를 완성해야 할 것입니다”라며.

현재 우리 대학은 9대 총장 백서 발간이 추진되고 있고, 여기에는 지난 4년간의 주요 실적과 성과가 수록될 예정이라 한다.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는 공과(功過)가 정확해야 함이 기본이다. 낯부끄러운 자화자찬이 아닌, 유지기가 감탄할만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의 수집과 기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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