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 구분은 폭력적
성적 지향은 ‘우연’의 ‘결과’
혐오 이전에 공감할 줄 알아야

10월 28일 제주도에서 퀴어축제가 열렸다.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한 집단들이 있었다. 그들의 구호는 대충 이랬다. “제주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에서 아들딸을 키우고 싶다.” “동성애 퀴어 집회를 허가한 제주 시청은 청소년 에이즈 확산의 원인이다.” “제주 정서와 성 윤리 붕괴하는 동성애 퀴어 집회를 반대한다.” 이들의 ‘혐오’ 감정의 밑바닥에는 두 가지 편견이 깔려 있다. 첫째는 동성애가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미풍양속’이라는 고색창연한 말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상’이 아닌 것은 모조리 ‘비정상’의 범주에 몰아넣고 ‘악’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모호한 생각이다. 둘째는 ‘비정상’인 동성애를 질병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전염’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알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남성은 ‘정상’이었고 여성은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였다. 지금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 역시 오랫동안 백인은 ‘정상’이었고 ‘유색’은 열등함의 낙인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전통시대 신분사회에서 ‘고귀한’ 혈통은 ‘정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미천한 존재였다. 누군가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한다면 공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러한 편견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였다. ‘비정상’의 위치에 놓인 다수의 사람들조차도 그랬다. 하지만 역사는 이 모든 것이 편견임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동성애는 예외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신의 섭리를 들먹일 것이고 누군가는 자연의 원리에 거슬리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 보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신의 섭리보다 인권이 우선한다고 말이다. 민주주의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만 그것은 타자의 종교, 타자의 생각, 타자의 정체성, 즉 타자의 인권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서 보장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여러 생각들이 중첩되고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의 이름으로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반민주적이다.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중첩적 민주주의, 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떠올려 보면 된다.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도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은 성적지향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성적인 쾌락을 향한 충동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발현되는가는 성장과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것이 우리 삶의 상당부분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것이 성적 지향과 성격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사회적 성장과정에서 ‘정상적’인 경로를 겪지 못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라고. 만약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 자체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우리의 성적 지향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생겨난 다양한 ‘결과’일 뿐이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이러한 반론은 바로 기각된다.

백번 양보해서 ‘정상적으로’ 사회화 되지 못한 결과가 동성애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유아기에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장애를 얻게 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인권원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정신병적인 요소를 안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혐오는 합리적인 근거를 갖지 않는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반유대주의를 분석하면서 언급했듯이 혐오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에이즈가 동성애와 관련이 없다는 과학적 근거는 동성애혐오자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동성애는 불결하고 전염성이 있다는 편견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정반대편에 있기에 동성애를 전염병으로 낙인찍는 혐오가 훨씬 전염성이 높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가 동성애를 전염시켰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리고 천재적인 수학자 앨런 튜링과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비극적인 삶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보다는 동료인간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공감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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