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칠전팔기해서 성공한 몇 사람만 보았지, 여덟 번 일어섰다가 아홉 번째 가서 영영 쓰러지구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숱한 사람들이 있는 건 모르는구나?”

채만식의 1938년작 소설 <치숙>에서 노력을 강조하는 조카에게 삼촌이 건네는 말이다.  근 80년 전 소설에서 나온 이 구절에 요즘 청년들이 그렇게 공감을 한다고 한다.

요즈음의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늘 노력을 강조한다. 어쩌면 ‘노오력’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 될 수도 있겠다. 노력에 노력을 이어가던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결국에는 대한민국의 현실에‘환멸’로 끝나는 분노를 안고 하루라도 빨리 이 곳을 나가려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품은 청춘들의 서글픈 현실이다. 

이미 경향신문은 2015년에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력이 필요해’라는 기사를 통해 스러져가는 청춘들에게 이어지는 채찍질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 기사를 읽은 청년들의 반응도 썩 밝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는 등 모진 현실에 달관한 모습 뿐이었다. 부조리한 사회 속, 어느새 그들은 희망을 놓아버린 것이다.

기자가 만난 한 학생은 노력이 어느새 하나의 가치관이 된 이 사회를 두고 “성장을 위한 노력은 분명 필요하지만 우리의 ‘노오력’은 허상에 불과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움직여본들 잡지 못할 신기루같은 대가만이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닐까.

선순환의 키워드로 강조되던 노력은 어느새 강요되는 악순환의 대표적 예시가 됐다. 청춘들은 어느새 ‘N포’가 아닌 ‘환생이 답’이라는 새로운 유행어를 쓰고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력에 어느새 포기하는 것마저 포기하게 된 것이다.

물이 99℃에서 1℃가 오르는 데는 이전의 540배에 달하는 열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하고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남이 인정하지 않은 우리의 노력은 충분히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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