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적 용어와 해체주의
어느새 외면할 수 없게 돼
정박점을 찾아봐야 할 때

움베르토 에코가 1970년대 정도에 쓴 시사평론들을 모아서, 1993년에 조형준이 번역, 출판한 책의 제목이다. 원제목의 순서는 뒤집었다.

기호학적 언어, 해체주의적 사고를 다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작년 11월 12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장수풍뎅이연구회’ ‘깃발’이 그것이다. 그날은 마침 ‘민중총궐기’ 당일이었다고 한다. 이 깃발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넷 공간에서 아직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민중총궐기’라는 그 어마어마한 구호 속에서, 그 흐름에 참여하면서도 벗어나려는 듯한 ‘장수풍뎅이들’. 순식간에 집회의 분위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이후 이른바 ‘아무 깃발 신드롬’이 폭발했다고 한다. 민주묘총, 전견련, 국경없는 어항회, 범야옹연대, 국제햄네스티, 얼룩말연구회 등등. 그런데 이거 ‘동물 이름 신드롬’은 아닐까.

이 장수풍뎅이연구회 깃발을 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취재도 이루어지고, 당사자임을 주장하는 트윗도 나타났다. 이게 흥미롭다. 이들은 ‘충북 영동군 학산면 도덕리’에 있는 진짜 장수풍뎅이연구회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는 벌레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에겐 처음부터 어떤 단체명이든 상관없었습니다. 뜬금없는 장수풍뎅이로 정치 현장에 나가도 ‘누구나 여기 참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목표달성입니다”(스브스뉴스 11월 16일).

장수풍뎅이연구회 명의의 트윗에서는 좀 더 이론적인 주장이 나온다. “저희 모임이 집회에 참석하면서 기존의 올드한 방식을 지양하고,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부유하는 기표로 모임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패시브효과: 적들의 혼란).” 부유하는 기표, 이른바 floating signifier와 패시브 효과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젊은 세대들의 ‘지적’ 언어와 사고가 7080과 달라졌다는 충격이 왔다. 1990년대 정도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기호학적 용어들과 해체주의적 사고들이 이제는 젊은 세대들이 넘어야 할 지적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는 느낌이 이때처럼 확실해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른바 주류정당들이 몰락하고, 정치적 주장과 세력이 파편화되는 세계적 현상들이 겹쳐졌다.

이제 기호학적 언어와 해체주의적 사고는 외면할 수 없게 되었구나. 법과 법학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작업이다. 그러나 법과 법학은 보편성을 지향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당파적 재판이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미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대할수록 법은 불안해진다. 그래서 해체주의적 사고는 법에서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법률가들은 그런 위험한 생각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런다고 지적 불안감이 떨쳐지지는 않는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에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새로운 중세는 새로운 적응방식을 요구하는 ‘변화무쌍’한 시기가 될 것이다. 문제는 … 갈등의 논리(학)속으로 파고 들어가 카오스를 활용할 수 있는 가설적인 명제를 설정하려는 데 있다.”(현대: 새로운 중세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1972). 나는 납득할 수가 없다. 물론 에코 스스로도 이렇게 냉소하고 있다. “새로운 중세에 대한 전망이 전적으로 만족스럽다고 누구도 주장하지 않으리라. 중국인들이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하여 말하듯이 ‘흥미로운 시대를 잘 살아 봐.’” 라캉이 말하는 point de capiton(‘정박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