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제주학연구센터 주최 탐라사 국제학술대회

3월 9일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열린 탐라사 국제학술대회에서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탐라문화의 생태주의와 국제주의’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제주역사 편찬의 토대 마련을 위한 ‘탐라사 국제학술대회’가 3월 9일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제주학연구센터(센터장 박찬식) 주관으로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일본에서 발굴된 탐라 유물인 탐라복(耽羅鰒)과 도라악(度羅樂)을 통한 고대 탐라와 일본 간의 대외관계 규명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학술대회에서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탐라문화의 생태주의와 국제주의: 반성적 재창조를 위하여’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발표는 스기야마 히로시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 국제유적연구실 특임연구원의 ‘고대 일본과 탐라와의 교류’,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부원장의 ‘고고자료로 살펴본 탐라의 대외교류’ 발표가 있었다.

이어 현행복 제주문예진흥원장의 ‘탐라의 무속 군무, 도라악’과 나이토 사카에 나라국립박물관 학예부장의 ‘나라 ‘정창원’ 보물에 보이는 ‘도라악’ 관련품’을, 오창명 제주국제대 교수가 ‘도라와 탐라의 관계와 어원’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10일에는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및 종달리 어촌계와 해녀박물관에 대한 현지답사가 열렸다.

대회 주제인 탐라복(耽羅鰒)은 일본 나라(奈良) 평성궁적(平城宮跡) 터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서 비롯됐다. 1963년 일본 헤이조궁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목간에 적힌 글자로 그 존재가 알려졌다. 탐라에서 채취되는 전복의 품종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어떤 경로로 고대 일본의 목간에 기록됐는가’라는 질문이 탐라문화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8세기 일본 궁중음악 중 외래악의 한 형태로 존재했던 도라악(度羅樂)의 기원이 제주인지 여부에 대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발표됐다. 도라악은 나라시대 일본의 국사인 ‘속일본기’의 731년 기록에 처음 언급되는 내용으로 탐라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나라시대에 세워진 동대사(東大寺)의 ‘보물창고’라는 정창원(正倉阮)에는 현재 도라악 관련품 8건이 보관돼 있다. 도라악이 제주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계기는 1993년 현행복 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의 논문 ‘일본 도라악에 대한 관견’이었다. 다음은 주요 발제자의 요지.

 

■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부원장 ‘고고자료로 살펴본 탐라의 대외교류’

 

“탐라시대 철 확보 위해 해외교역 활발”

 

탐라는 주호가 개척한 남해안 교역루트를 계승하여 남부지역의 다양한 정치체와 활발한 대외교류를 진행했다. 탐라 등장 이전의 대회교류 양상을 보면 변한 지역의 무역항인 늑도유적을 중개지로 해 직간접적인 대회교류가 이뤄졌다. 산지항 출토 환경은 왜 변한에서 주호로 연결되는 대외교역루트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자료에 해당한다.

탐라가 등장한 이후 3세기 후반경에는 안정적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낙동강 유역의 철 생산 중심지에 해당하는 금관가야와 교섭을 진행했다. 왜국 역시 동시기에 철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교섭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결과 김해 대성동고분에서는 왜계 유물이 다량출토되고 있다. 하지만 5세기 전후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인해 금관가야는 쇠퇴하고 이로 인해 철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는 크게 친신라계인 동래 북천동 집단과 함안 아라가야, 합천 대가야로 재편된다.

5세기 이후 탐라는 철소재의 수급을 위해 아라가야와 교섭을 맺고 새로운 교역루트를 개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전남 동부권역의 여수반도 일대에서 아라가야 문물이 집중되는 점을 고려하면 탐라가 여수반도를 경유해 아라가야로 연결되는 고대 교역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탐라권역에서 출토되는 외래토기를 보면 영산강 양식이 주체적이고 남부 가야계 투기가 확인되는 점도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6세기에 접어들면 대외교류의 중심은 소가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영산강 유역과의 교류가 급증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영산강 유역과 긴끼지역에서 토기를 비롯한 문물의 유입과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탐라는 이러한 대외 교역프로세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6세기 전반 이후 전남지역이 백제의 영역화에 놓이면서 대외교류의 헤게모니는 백제로 일원화되고 탐라 역시 수동적으로 전환된다.

 

■ 현행복 제주문예진흥원장 ‘탐라의 무속 군무, 도라악’

 

“도락악은 탐라에서 넘어간 무속음악”

 

1914년 발표된 도리이 류우조의 <민족학상으로 본 제주도>에 “제주에는 무당이 하는 우스운 음악이 있다. 이 섬의 무당 수는 매우 많아서 조선의 모든 곳과 비교해서 여기만큼 많은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사 때 조선총동부에 부탁해서 무당의식을 행해주도록 부탁했는데 의식 땐 1백인 정도의 무당이 모여서 하는 것이다. 특히 정월원단에 하는 의식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미 도라악이 탐라의 음악일 가능성을 ‘도라’란 한자어가 ‘탁라’라고도 읽힐 수 있는 점을 들어 탐라의 어원 가운데 하나로 ‘탁라’란 발음체가 형성되고 있음을 그 근거로 제시했었다.

지난 1993년에 <일본 도라악에 대한 관견>이란 논문을 한국음악사학보에 발표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96년엔 데이비드 워터하우스(토론토대학 교수)의 논문 도라악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한국음악사학보에 소개하기도 했다.

8세기 일본 궁중음악 중 외래악의 한 형태로 존재했던 도라악은 탐라의 무속음악이다. 군무에 참가한 이들 연주가 62명은 탐라에서 일본에 건너간 이주민들로서 악호의 신분을 지닌 이들이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탐라라는 존재는 한 본토에 딸린 국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립 국가로서 비록 백제나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이긴 해도 자신들의 견당사 일행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동안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라는 인식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삼국악(고구려, 백제, 신라의 음악)이 우방악에 배치한데 비해 도라악은 중국음악 등과 함께 좌방악에 소속시켰을 것이란 추정이 서게 한다.

 

■ 오창명 제주국제대 교수 ‘도라와 탐라의 관계와 어원’

 

“추정만 가능할 뿐 단정은 삼가야”

 

일본 학자들이나 비일본 학자들이나 우리나라 학자들이나 대부분 <속일본기>에서 확인되는 도라악의 도라를 탐라라고 하고 싶은 심정인 듯하다. 대부분 도라와 탐라가 음성적으로 유사하다고 해서 도라를 탐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증거로 내세우는 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본 학자나 그 외의 외국학자들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도라가 제주도를 일컫는 것이라 단정하거나, 나아가 도라악을 참라악이라 단정하기까지 하고 있다.

<일본서기> 또는 <속일본기>에도 제주도를 이를 때는 ‘탐라’나 ‘탐라도’로 표기했다. ‘탐라복’에서도 탐라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탐라’도 제주도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제주도를 일반적으로 ‘탐라’라 표기했는데, <속일본기>의 일부 기사에서 탐라의 음악과 탐라 출신 음악인을 부를 때만 ‘도라악’이라고 했다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아주 많다.

근 300여 년 동안 일본 학자들이 도라악과 도라에 대해서 연구해 왔지만 지금까지도 다람쥐 쳇 바퀴 돌듯하고 있다. 그래서 공간된 일본 사전에서조차 단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음악학자들이 일본 일부 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정화시킨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도라악과 도라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확인될 때까지, 도라는 탐라의 이표기라는 단정을 미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욱이 도라악이 곧 탐라악이라는 단정도 삼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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