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아 미안하다. 사인안해줘도 인사는 잘 할꺼지? 그리고 줄서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지! 왜? 제주대학교니까"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쯤 익숙한 메일들이 도착한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수강신청에 실패했는데 개강 후 사인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메일이다. 사전에 지정한 인원이 꽉 차서 수강신청을 못한 모양이다.
메일을 받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학생들이 보낸 메일을 읽으면서 생각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어떤 메일은 부탁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떤 메일은 읽은 후 화가 나기도 한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더라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강 후 또 하나의 풍경은 교수 연구실 앞 복도에 길게 늘어선 줄이다. 내가 속해있는 단과대학만 이런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연구실 앞에 기다리다가 교수로부터 사인을 받으려는 행렬이다. 이런 풍경은 익숙해져서 무심히 지나치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줄을 서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컴퓨터의 성능이 느려 수강신청을 못했나? 약간의 게으름을 피웠나? 교수들이 연구실을 비워서? 등 여러 가지가 생각나면서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일률적으로 편성하고 따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수요에 기초해서 공급을 해야 할 것이다. 적정 수강 인원이 넘어가면 학생이나 교수 모두에게 득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당국은 진작에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기다보니 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더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으로 생각하고 싶다. 학생들과 교수, 직원들이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면 충분히 좋은 방법이 나올 것이다.
편의점에서 컵에 담긴 수박을 사보면 작은 미늘이 달린 플라스틱 포크를 보게 된다. 컵 아래쪽에 있는 수박을 찍어도 포크가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라 편리하다. 포크 끝의 미늘은 정말 작은 부분이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배려가 때론 큰 울림이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배려할 방법을 찾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상대가 자주 하는 질문이나 행동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한다면 서로의 입가에 웃음이 번질 것이다.
수강신청 용지에 사인을 해주는 것이 배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런 익숙한 일들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할 때 한발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창조적 파괴에 해당되는지도 모르겠다.
슘페터는 ‘Capitalism, Socialism, Democracy’에서 창조적 파괴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의 초점은 창조나 혁신 그 자체보다는 관행화 또는 진부화에 있다. 모든 것은 관행으로 전락하고 반드시 진부화 된다. 문제는 이 진부화된 방식에 매달리다보면 자신의 존립 기반을 서서히 잃게 된다는데 있다.
대부분의 조직과 구성원들은 지금 따르는 방식이 관행이자 타성인지를 잘 모른다. 과거의 안락함 속에 살던 사람들은 퇴출당할 즈음에 가서야 뒤늦게 저항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생 수 감소가 대학에 많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학생들이 말없이 줄서는 침묵시위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수강신청을 위해 연구실 앞 복도에 줄을 서는 모습이 없어져야 한다. 규정을 고쳐야 한다면 고치면 된다. 이 외에도 우리가 타성에 빠져있는 것들이 있다면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함께한 65년도 중요하지만 함께할 65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할 65년은 학생들을 키워주고, 앞날을 보여주며, 더 밝은 내일로 이끌어주는 전봇대 같은 대학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