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탄압, 항쟁, 그리고 대수난
적극적 평화 지향해야

3월 31일 제주벤처마루 세미나실에서 김종민 강사가 ‘제주4ㆍ3의 배경과 전개 과정’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4ㆍ3 전문기자와 4ㆍ3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낸 김종민의 ‘4ㆍ3시민아카데미’는 인터넷신문 <제주의소리>가 4ㆍ3 7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자리다. 5차례에 걸쳐 4ㆍ3의 전 과정과 과제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강좌다. 제주대신문은 학생들의 4ㆍ3에 대한 배경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 5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주>.

제주4ㆍ3때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극은 참혹했다. 이는 비록 가난했으나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왔던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국민 대부분은 4ㆍ3을 알지 못했고, 설령 조금 알았다 해도 미군정기 분단 상황에서 발생한 제주도만의 돌출사건으로 인식하며 외면해 왔다. 정부는 진상규명과 사과는 커녕 사건발생 40여년간 ‘공산폭동론’만을 주장하며 4ㆍ3을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다.

저항과 탄압, 항쟁, 그리고 대수난


제주4ㆍ3은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공동체 의식과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제주역사의 상징’이며,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어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까지 이끌어낸 ‘과거사 진상규명 운동의 효시’이며,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상처를 교훈 삼아 평화와 인권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평화와 인권의 상징’이다.

과거 군사정권은 제주4ㆍ3을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규정했다. 반면 시민단체와 학계 일각에서는 ‘항쟁’ 또는 ‘민중항쟁’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인식차이로 인해 정명(正名)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ㆍ3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ㆍ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ㆍ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 1960년 ‘4ㆍ19혁명’, 1961년 ‘5ㆍ16군사정변’과 같은 사건들은 열흘 안팎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벌어졌기 때문에 비록 시각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각자 입장에 따라 사건을 정의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47년 3ㆍ1절 기념식때 다른 지방에서 온 응원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된 사건은 제주도를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경찰 발포에 항의해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에 대해 미군정 경찰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며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4ㆍ3무장봉기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무려 2500명이 구금됐다. 무장봉기 한달 전인 1948년 3월에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졌다. ‘저항과 탄압의 국면’이었다.

그러자 ‘항쟁의 국면’이 펼쳐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일제히 봉화가 타오르면서 이를 신호로 약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을 동시에 공격했다. 또한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해 살해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ㆍ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무장대는 5ㆍ10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결국 제주도는 전국 200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만이 무효화 됐다. 그런데 항쟁 못지않게 탄압도 중첩돼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곧이어 참혹한 ‘수난의 국면’이 전개됐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불태웠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특히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약 5개월 동안 벌인 이른바 ‘초토화작전’때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치른 희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아낙네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듯한 한라산으로 향했다. 숨었던 굴이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다.
해변마을로 소개(강제이주)한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수시로 학살했다. 해변마을 주민들도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토벌대는 걸핏하면 ‘무장대 지원 혐의’가 있다며 총질을 했다. 이러한 행위의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던 미군에게 있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학살극이 재연됐다. 도내에서는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1000여명의 목숨이 희생됐고, 또한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아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2500여명의 제주도민이 인민군에게 쫓기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 됐다.

이처럼 7년 7개월간 벌어진 사건의 전개과정은 ‘탄압의 국면’, ‘항쟁의 국면’, 그리고 ‘탄압이나 항쟁’이라는 용어를 무색케 하는 엄청난 ’수난의 국면‘이 중첩되면서 차례로 펼쳐졌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러한 여러 국면 중 하나만을 특정화해 명칭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비록 토벌대에 의한 희생보다 그 비율이 훨씬 작지만,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엄연히 존재하는 점도 정명 붙이기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더 오랜 세월이 흘러 개인사, 가족사적인 체험과 기억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이고 긴 호흡을 가진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4ㆍ3에 대해 정명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 평화 지향해야

제주4ㆍ3 시기에 벌어졌던 야만적 폭력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세계적 수준의 냉전과 남북 분단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4ㆍ3은 평화ㆍ통일ㆍ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살육이 벌어지고 있고, 강대국간 힘겨루기도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은 4ㆍ3이라는 엄청난 희생의 후유증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극복해 왔다. 이젠 남북의 평화는 물론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평화ㆍ인권의 성지로 가꿔나가야 할 것이다. 아시아 평화교육센터, UN평화대학, 또는 세계적인 인권센터 등 국제적 규모의 평화 기구를 유치하는 등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평화지대 선포와 평화교육 의무화 등 프로그램 개발부터 관련 정책이나 법령의 제정까지 다양한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제주도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해주는 완충지 또는 균형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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