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의 봉기와 현대사회

구 준 모사회학과 석사과정

‘상상력에게 권력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서른을 넘은 자는 믿지 마라’. 가슴을 뛰게 만드는 구호들이 분출된 1968년의 봉기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다. 에릭 홉스봄이 말했듯이 1968년의 봉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프랑스, 독일, 미국뿐만 아니라 체코와 유고, 멕시코, 일본과 중국 등지를 휩쓴 ‘전지구적 반란’이었다. 이메뉴얼 월러스틴은 1968년을 역사상 단 두 차례 존재한 세계혁명 중 하나라고까지 평가했다.

왜 1968년에 봉기가 전 세계를 휩쓸었을까? ‘68년 5월’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사례는 전형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첫째, 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나 성장한 청년 세대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것이 대학의 문제를 계기로 폭발되었다.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1945년에는 10만 명 정도였으나 1960년대 후반에는 65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대학 시설은 열악했고 교수들의 강의는 상투적이었다. 구세대들은 청년들의 문화와 열망을 이해도 수용도 못했다. 기숙사의 통금 시간과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방문 금지 규정이 불만이 폭발하는 기화제가 되기도 했다. 둘째, 프랑스공산당과 노동총동맹(CGT)로 대표되는 구좌파는 청년 세대의 불만을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하였다. 구좌파들은 당시 거리에 나선 청년들을 “유복한 마마보이”, “사이비 혁명가”, “극좌 모험주의”로 비난했고 노동자들의 파업 참여도 막으려고 애썼다. 섣부른 행동은 극우파에게 빌미를 제공할 뿐이고 좌파 정치의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반면 거리의 투사들에게 구좌파는 드골과 마찬가지로 청산해야 할 기존 체제의 일부로 보였다.

구체적인 사건들의 전개는 나라마다 달랐지만, 새로운 세대와 불만을 대변하지 못하는 기성 질서와 구좌파의 한계가 1968년 봉기의 공통적 배경이었다. 보다 거시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세계적 질서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볼 수도 있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1968년의 봉기는 삼중의 도전이었다. 첫째, 미국의 헤게모니와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1968년은 전후 30년 동안 지속된 자본주의의 황금기의 절정이었지만,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적 지배가 계속되고 있었다. 둘째, 자본주의 진영과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 하위 파트너에 머문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도전이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 탱크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셋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과 다른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독재에 머문 제3세계 지배 집단에 대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각국 청년들은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상황주의,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 등 새로운 혁명 이념을 동원해 운동을 펼쳐나갔고, 체 게바라, 호치민, 마오쩌뚱 등 제3세계의 혁명 지도자를 이상화하기도 했다. 운동의 참여자들이 좌파를 혁신하고 새로운 좌파의 이상을 제시하고 싶어 한 것이다. 그들은 기성의 질서에 잘 편입하기 위해 봉기한 것이 아니라 기존 체제를 변혁하려고 봉기했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도 않았다. 프랑스 68운동의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다니엘 콘벤티드는 운동의 목적을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기존 체제의 완전한 파괴”라고 밝혔다.

사르트르, 라캉, 르페브르 등도 1968년 5월 10일 <르몽드>지에 발표한 선언문에서 청년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사르트르는 같은 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시위의 과격화를 우려하는 이들에게 반론을 제기하고 청년들의 봉기를 전적으로 옹호했다. “우리의 일그러진 서구 여러 나라에서 유일한 좌익계 반론 세력은 학생들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에 모든 젊은이들이 동참하기를 바란다. 현재 그들의 투쟁 형태가 어떤 것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학생들이 할 일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충고를 할 수 없다. 우리가 비록 일생 동안 항거를 해 왔다 해도, 우리는 많든 적든 여전히 이 사회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1968년의 봉기는 신좌파와 신사회운동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였다. 1968년의 열기는 오래지 않아 사그라졌지만, 그 후 비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이 확산되고, 권위와 성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보편화되고, 환경운동,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이 성장했다.

하지만 보다 논쟁적인 평가도 있다. 1968년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이것이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1968년에 봉기한 청년들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자유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급진적인 노동운동과 결합되어 있었고 여전히 좌파적인 혁명 전망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8년의 운동이 명확한 성과나 조직적 유산 없이 끝나버린 뒤에 남은 것은 자유와 욕망에 대한 해방이었고, 이러한 정신은 신자유주의에 동원되었다.

예측하지 못한 이런 변화의 원인은 좌파의 혁신이 좌절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1968년 봉기의 정신을 계승한 활동가들은 구좌파와 신좌파 양측에서 혁신과 실험을 이어갔다. 하지만 1970년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지의 대중적 공산당에서 시도되었던 유로코뮤니즘이 실패하면서 구좌파 내에서의 개혁은 난관에 부딪혔다. 신좌파들도 기존 좌파와 차별화에 노력하면서 신사회운동 등 정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지만, 경제와 계급이라는 중요한 영토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신자유주의적 이성은 1968년의 봉기가 해방시킨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찬양하고, 복지와 규제를 비난하고, ‘경쟁’, ‘기업가정신’과 같은 가치를 절대화시켰다. 개인의 자유와 욕망은 연대나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와 경쟁, 자기 자신에 대한 기업가적 관리를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 되어갔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닐 것이다. 1968년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과 그 정신을 잇는 실천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외에 대안은 없다”는 주장에 맞서, “우리가 대안이다”를 외친 대안세계화운동의 수사는 1968년에서 유례된 것들이었다. 기성 체제에 대한 부정, 새로운 관계성의 창출, 낡은 문화의 전복은 오늘날에도 매우 긴요한 일이다. 그것을 50년 전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청년과 기성세대들은 콘벤티드와 사르트르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기존 체제의 완전한 파괴!” “우리는 그들에게 충고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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