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지음<논 어>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방에 가면 습관적으로 책장을 스캔한다. 책장을 둘러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책장에는 개인

이 고민과 역정이 그대로 녹아 있다. 한편으로는 “저 책들은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가질까?” 하는 궁금함도 떨칠 수는 없다.

나는 “오래된 책, 즉 고전이 좋은 글이다.” 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 당시의 제후와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BC 45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약 2500년 동안 인류의 책장을 지키고 있는 고전인 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머리이다. 대학 1학년 때 공부하겠다고 용맹스럽게 <논어>를 구입했었다. 그야말로 까만 것은 글씨이고 하얀 것은 종이였던, 그런 책이었다. 첫 구절을 읽고 나서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이 책을 꼭 원문으로 읽어야 되나?’ ‘이 두꺼운 책을 어느 세월에 다 읽나?’ ‘읽는다고 뭐 바뀔까?’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난감한 상황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래도 대학생이 됐는데...’하면서, 문득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공자는 왜 배우는 것이 기쁘다고 하지?”

이렇게 화두를 던지고 나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면 뭘 배워야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 거지?”, “나는 지금껏 뭘 배운 거지?”, “배워서 뭘 하지?” 등등. 그렇게 하나의 화두는 별처럼 많은 질문이 되어 머릿속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책상에 머리를 쳐 박고 살았었다. 오로지 점수에 몰두했었다. 그러다 읽은<논어>는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첫 구절의 감동과는 달리 <논어>를 읽는 기간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문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1년을 아등바등 <논어>와 씨름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읽고 나서 몇 가지 사항을 몸으로 깨달았다.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스터디의 중요성이었다. 동료와 책을 함께 읽는 것이다.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다보니, 나의 생각을 타인과 나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사실관계를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었다. 어차피 공부는 결국 자기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벽은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대학시절에는 그 벽을 깨지 못했다. 

그 벽을 깨뜨려 준 것은 낭독이었다. 그냥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백 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그 말을 몸으로 실천했다. 책에 손때가 거뭇하게 새겨질 무렵, 분명한 변화가 나타났다. 처음에 더듬거리던 발음도 빨라지고, 불분명했던 뜻도 명확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냥 내 입으로 <논어>구절을 뱉어내고 있었다. 나 자신도 놀라는 나만의 기적이었다.
아울러 “독서백편의자현”이란 말이 거짓인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많이 읽어도 모르는 구절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구절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인지한 것이다. 모른다는 자각은 또 다른 물음표가 되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마음의 물음표가 다시 나를 키워주었다.

<논어>는 한글은 물론 라틴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외국어를 공부하기에도 참 괜찮은 책이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서체로 된 <논어>도 출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문은 타임머신”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살펴보고 싶은 시간을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논어>는 그 타임머신을 운전할 때 필요한 면허증 정도 될 것이다.

푸르른 봄이다. 꼭 <논어>가 아니어도 책을 읽고 생각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또 다른 <논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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