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고유사업 수행하면서 재단 10주년 평가ㆍ성찰 기회 가질 것
4ㆍ3을 변방의 역사와 단순한 제주도 사건으로 보는 측면 아쉬워
‘항쟁’,‘학살’ 등 정명 붙이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

제6대 제주4ㆍ3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양조훈(국문 69학번) 동문. 1988년 제주신문과 제민일보에서 4ㆍ3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4ㆍ3기획물을 10년 넘게 연재했고, 4ㆍ3특별법 제정이후에는 정부 4ㆍ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실무 책임을 맡아 대통령의 사과를 이끌어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설가 현기영은 “양조훈은 4ㆍ3비밀의 키워드가 되어 있는 이름”으로 평가했고, 뉴욕타임스는 “4ㆍ3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보도하기도 했다. 제주4ㆍ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도 환경부지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4ㆍ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는 등 4ㆍ3진상규명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편집자 주>

 

 

- 4ㆍ3 70주년이란 중차대한 시기에 이사장을 맡았다. 취임 소감은.

양 조 훈 이사장

“1988년 4ㆍ3취재반장을 맡으면서 운명적으로 4ㆍ3을 대면한지 꼭 30년 만에 제주4ㆍ3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이사장 취임을 앞두고 과연 제게 그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 자문을 해봤다. 만약 저게 그러한 자격이 있다면 제주4ㆍ3에 대한 공감 능력이 아닌가라고 감히 생각한다. 공감은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기쁨과 슬픔으로 ‘공(共)히’ 느끼는 능력을 의미한다. 공감이 없다면 4ㆍ3은 우리와는 무관한 70년 전의 과거사가 되고 말 것이다. 70년 전 이 땅에서 스러져간 희생자들과 그분들이 꿈꿨던 세상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노력해 왔다.”

-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자 하는 일들이 있다면.

“제주4ㆍ3평화재단의 사업은 법적으로 정해진 것이 있다. 4ㆍ3평화공원과 4ㆍ3평화기념관 운영, 추가진상조사, 희생자추모사업, 유족복지사업, 문화학술사업, 국제교류사업 등이 그것이다. 일단 재단 고유의 목적 사업들을 점검하고 충실히 수행해 가겠다. 특히 금년은 재단 발족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의 업적에 대해 평가해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더불어 4ㆍ3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위상과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소통과 협치에도 역점을 두겠다. 화해정신의 확산과 함께 4ㆍ3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대응, 연구기능의 강화, 교육프로그램의 확대 등도 추진해 나가겠다.”

 - 1988년 당시 제주신문에서 4ㆍ3취재반장을 맡아서 ‘4ㆍ3의 증언’연재를 시작했고, 1990년 제민일보의 창간과 함께 ‘4ㆍ3은 말한다’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도민사회의 반향도 컸는데 그때 당시는 어떠했나.

“제주4ㆍ3의 진실은 반세기 가까이 지하에 갇혀 있었다. 게다가 ‘공산폭동’이라는 붉은 색도 칠해져 있었다. 1988년 4ㆍ3취재반이 결성될 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4ㆍ3이‘북한공산당의 사주아래 일어난 폭동사건’으로 기술돼 있었다. 그러니 겁이 났었다. 4ㆍ3취재가 시작되자 유족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졌던 ‘빨갱이’ 누명을 벗겨달라고 하소연했다. 공안당국에서는 ‘사회 안정을 해친다’면서 여러 형태의 압박을 가해 왔다. 4ㆍ3보도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것은 개인 신상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문사의 존폐와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과 ‘인본’을 버팀목 으로 삼아 철저한 검증작업을 반복했다. 4ㆍ3에 관한 어떠한 자료나 증언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검증과 검증을 거듭한 끝에 확인된 것만 보도했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우리 4ㆍ3취재반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 국내외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됐다.”

- 4ㆍ3취재와 연구로 보낸 세월도 30년이나 됐다. 이제 4ㆍ3은 어떤 모습으로 보이나.

“처음 4ㆍ3취재를 할 때는 미로에 빠진 느낌이었다. 관변자료는 물론이지만 4ㆍ3을 체험했던 분들의 증언도 사건마다 각기 다른 경우가 많았다. 4ㆍ3을 체험한 분들은 누구나 자신이 4ㆍ3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단편적인 경험이나 지식 혹은 풍문으로 4ㆍ3전체를 재단하려고 한다. 어떤 이는 근시안으로 특정 부분만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고는 제주사람끼리 서로 헐뜯고 죽였다는 식의 결론을 내린다. 30년 동안 조사한 결과, 그렇게 접근해서는 4ㆍ3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4ㆍ3은 분단과 냉전의 모순이 대표적으로 표출된 사건이고, 제주 땅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투박하게 비유하자면, 4ㆍ3희생자들은‘미국과 소련이란 고래 싸움에 등터진 새우 같다’할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접근할 때, 왜 제주사람끼리 화해하고 용서해야 하는지, 답안지가 나오게 될 것이다.”

- 4ㆍ3의 무게에 비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전국 언론의 외면도 한몫했다고 보인다.

“제주4ㆍ3을 변방의 역사, 단순히 제주도 사건으로 보는 측면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기성세대는 4ㆍ3을‘공산폭동’으로 기술한 교과서를 통해 배웠지 않았나. 그 낙인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측면이 있다. 오히려 미국 뉴욕타임스나 일본의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등에서 먼저 4ㆍ3을 크게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4ㆍ3 70주년을 맞아서 전국언론이 4ㆍ3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 4ㆍ3진상규명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70년 전 발생한 4ㆍ3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없다고 한다. 4ㆍ3의 정명(正名)은 어떻게 붙여져야 하는가.

“제주4ㆍ3은 여러 형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무장봉기 또는 항쟁으로서의 4ㆍ3’, ‘반분단 통일운동으로서의 4ㆍ3’, ‘민간인 대량학살로서의 4ㆍ3’이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학계에서는 주로 1947년과 1948년의 상황을 주목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 표현할 수 있고, ‘항쟁’이란 단어에 무게감이 실린다. 그런데 4ㆍ3을 직접 체험한 제주사람들은 그 이후에 진행된, 즉 1948년 말 초토화 이후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명령이 해제될 때까지의 악몽 같은 세월도 기억하고 있다. 산사람과 지역민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채, 지역민들이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던 시기였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이 보는 4ㆍ3은 단순치 않고 복잡하다. 최근 두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듯이, 4ㆍ3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 ‘항쟁’보다 ‘양민학살’에 훨씬 더 많은 비중으로 결과가 나타난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정명을 붙이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동학난’이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바꾸는데 1백년이 걸렸다. 그렇게 오래 갈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 4ㆍ3희생자추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안내도 하셨는데,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나.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 행방불명인 묘역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추념식장으로 입장했다. 입장하기 전 70년 동안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봉분을 만들 수 없었던 행방불명 희생자 3896명의 표석을 새긴 곳이라고 설명을 드렸다. 대통령께서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최선을 다해 행방불명인 유해 발굴을 합시다”라고 독려했다. 추념식 막바지에는 대통령께서 위패봉안실로 들어갔다. 추념식 때 정부 대표가 위패봉안실로 들어간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마을별로 희생자 위패가 진설됐다고 설명한 뒤 마을에서 537명이 희생된 노형리를 예로 피해 상황을 설명 드렸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한 마을에서요”라고 반문하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조천면 선흘리 위패가 있는 곳에 술잔이 있기에 “대통령님,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술 한 잔 올리겠습니까”라고 권했더니 흔쾌히 헌주를 했다.”

- 이번 추념식 때의 문재인 대통령 추념사도 화제가 됐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감동과 공감’이 있는 추념사였다. 문 대통령은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다’며 추념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4ㆍ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에도 4ㆍ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ㆍ3은 깨어났다’면서 4ㆍ3단체와 예술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했다. 대통령은 국가권력으로 말미암은 모든 고통에 대해서 다시 사과했고,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그 뿐만이 아니라 4ㆍ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념 논쟁에 대해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밝혔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다’고 선언했다. 엄숙한 분위기의 추념식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마다 유족들이 모두 11차례의 박수를 치기도 했다.”
- 4ㆍ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일단 4ㆍ3특별법 개정안에 담아있는 내용들, 즉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불법 군법회의에 의한 수형인명부 무효화,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호적 정리와 정명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움직임이 시급하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책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제주4ㆍ3이 당당한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국민적인 공감대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4ㆍ3의 완전한 해결은 남과 북의 문제가 풀릴 때 가능하다고 본다.”

- 끝으로 한 말씀.

“저는 제주4ㆍ3의 원 뿌리는 분단과 냉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주4ㆍ3은 비록 제주 땅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세계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사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동서 냉전 상황, 한반도의 분단 상황, 미군정이 통치한 해방공간의 모순 구조, 제주도의 저항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여건을 총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역사의 화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정식으로 역사 문제를 풀어갈 수는 없다. 제주도민은 역사 소용돌이 속의 희생자란 인식아래, 제주 사람끼리 화해하고 용서하자는 취지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4ㆍ3을 탐색하고 알리며, 기념하고 화해하는 일은 70주년을 맞은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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