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계엄령과 군법 회의

김종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대표가 공개한 4.3 당시 불법 계엄령.

4ㆍ3 전문기자와 4ㆍ3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낸 김종민의 ‘4ㆍ3시민아카데미’는 인터넷신문 <제주의소리>가 4ㆍ3 7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자리다. 5차례에 걸쳐 4ㆍ3의 전 과정과 과제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강좌다. 제주대신문은 학생들의 4ㆍ3에 대한 배경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 5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주>.

제주4ㆍ3의 전개과정에서 계엄령(戒嚴令)만큼 제주도민들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진 용어도 드물다. 여기서 지칭하는 ‘계엄령’은 단기 4281년(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에 의해 선포된 계엄령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공포한다. 4ㆍ3 당시부터 계엄령은 초법적인 조치로 알려져 있었다. 재판절차도 없이 수만명의 인명이 즉결 처형된 근거로 인식됐다.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조차도 ‘계엄령’이란 용어만은 빠뜨리지 않았다. 남편이, 혹은 아들과 손자가 군경토벌대에게 무고하게 희생당했다고 강조하면서도 말미에는 꼭 “그 때는 계엄령 시절이라서” 또는 “계엄령 때문에”라며 시국 탓을 했다. 이들에게 계엄령이란 체념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가족이 죽은 이유였다. 심지어 촌로들은 계엄령을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제도’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는 계엄령 시절이라서”

계엄령 선포 아래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벌어진 이른바 ‘초토화작전’은 80대 노인에서부터 서너 살 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과 마을 방화로 이어졌다. 차마 상상하기조차 힘든 아비규환의 장면이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이 ‘계엄령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설령 나중에 제정된 계엄법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범법자는 군법회의라는 재판절차를 받도록 돼 있다. 그러나 4ㆍ3 때 수많은 사람들이 계엄령이란 이름아래 ‘즉결심판’됐다. 또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1948년 11월 17일’ 이전에 벌어진 무분별한 학살극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계엄령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이승만뿐만 아니라 국무위원 친필 서명이 담겨졌고, 내용은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지경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 주둔 육군 제9연대 대장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령으로 선포한 계엄령은 위헌적이고 불법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이승만이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지구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령 제31호’를 제시하면서 △제헌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명시, 계엄선포를 법률에 위임했음에도 실제 계엄법이 제정된 1949년 11월 24일 보다 1년이나 앞서 계엄이 선포됐고 △제헌헌법 제99조에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는 점을 들었으며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가 계엄령(martial law)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한 당시 주한미군의 기밀문서가 존재한다.

불법 계엄령이 빚은 참극

1948년 7월 5일 공포되고, 8월 4일 효력이 발생한 국방경비법 역시 제대로 된 법률이 아니다. 국방경비법은 기본적으로 군인을 대상으로 한 법이지만, 제1조 5항에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복형(服刑) 중인 자’도 피적용자로 규정해 민간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미군정 시절에 행해진 군법회의의 효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제2차 군법회의의 근거는 계엄령이 해제됐기 때문에 국방경비법 제32조와 제33조(간첩) 위반 혐의로 제주도민 1660명이 재판을 받게 됐다. 국방경비법이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8년 7월 5일 공포됐다. 과도입법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나오는 데 실질적으로 제정ㆍ공포된 바 없는 유령법령이다.

특히 제1차 군법회의는 이승만이 불법으로 계엄령을 선포했고, 제2차 군법회의는 유령법률인 ‘국방경비법’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불법 군법회의가 주목받게 된 것은 1999년 추미애 의원이 국가기록원에서 수형인명부를 발굴, 공개하면서부터다.

계엄령이 선포됐던 1948년 12월 제1차 군법회의는 제주도민 870명에게 형법 제77조(내란죄)를 적용했다. 1949년 6월과 7월에 이뤄진 제2차 군법회의는 제주도민 1660명을 국방경비법 제32조(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 또는 방조)와 국방경비법 제33조(간첩)를 적용해 희생시켰다.

국방경비법에 민간인을 즉결 처형하라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또 위반자를 처벌할 군법회의에 대해 상세히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4ㆍ3때 제주도민 대부분은 군법회의는커녕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즉결 총살됐다. 국방경비법에는 ‘살인 및 강간’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다(제48조). 만일 이 법이 법률적 효력을 갖춘 것이라면 가장 먼저 처벌을 받아야할 사람들은 바로 토벌군인들이었다.

유령 법률에 희생당한 제주도민

정부 수립 이전 과도입법위원회가 만든 법률은 총 12개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로 국방경비법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과도입법위원회가 만든 법률은 미군정 관보에 모두 실려 있지만 국방경비법은 없다. 허위로 조작돼 만든 법률로서 법안 ‘번호’도 없다. 게다가 1949년 6월과 7월은 계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도 없었다. 국방경비법에는 모든 조항이 국법 피적용자라고 적시돼 있다. 이런 허명의 법률로 제주도민 1660명은 전국 각지 형무소로 수감됐다.

1차와 2차 군법회의로 제주도민 2530명은 무기와 20년 이상은 마포와 서대문형무소, 15년은 대구형무소, 7년형 대전형무소, 여성은 전주형무소, 미성년자는 인천형무소로 분산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마포와 서대문, 인천형무소에 있던 수형인은 행방불명됐다. 나머지 대전이남 형무소에 있던 수형인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초토화작전과 불법 계엄령, 그리고 불법 군법회의의 책임은 당연히 당시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있다. 미국의 책임도 있다. 미 군정이 끝나고 정부가 수립된 후 8일만인 8월 24일 한미 군사협정이 체결됐고, 이 군사협정으로 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갖게 됐다. 따라서 제주에서 벌어진 9연대와 2연대의 대규모 초토화 작전은 미국의 지시나 적어도 방조 없이는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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