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은 가사노동과 사회생활에서의 불평등,
가부장제의 권력자원인

서 영 표사회학과 교수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노골적인 이해관계, ‘현금 계산’ 이외에 아무런 끈도 남겨 놓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신앙적 광신, 기사도적 열광,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외경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보장된 혹은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칼 마르크스가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저술한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가 서른 살이던 1848년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화된 자본주의 세상에 더 잘 들어맞는 것으로 수없이 인용되었다. 지금 우리는 연대와 신뢰가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어’져 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국제조약과 헌법, 각종 법률에 의해 보장된 권리의 목록과 무관하게 시장의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통찰력이 놀랍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구절이 있다.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낡은 관계들은 자본주의적 합리화 앞에 일소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가부장제적인 관계는 얼굴을 달리한 채 더욱 강화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로 변형되었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자신과 가족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가치라고 정의되었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가사노동은 여성의 ‘봉사’로만 간주되었다. 자본주의는 여성에 대한 ‘감추어진’ 착취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생존을 위해 일터에 나갔던 여성들의 노동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저평가되었다. 정치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여성의 정치 참여는 제한받았다.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와 여성 정치참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성(性)에 대한 담론을 억압하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문화가 팽배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삶의 일부인 성의 문제를 마치 부끄러운 것인 양 은밀한 곳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노골적으로 성을 상품화하는 사회인 것이다. 한국의 여성은 3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사노동에서의 불평등, 사회생활에서의 불평등, 그리고 성적대상화에 동반되는 폭력의 위협. 모든 것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던져 버렸던 근대 자본주의는 최소한 형식적이나마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계약주체로 개인이 가지는 권리를 정립했다. 여성은 이러한 근대적 인권체제 아래서조차 ‘타자’였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아내와 엄마로서의 의무감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했던 여성들에게 공적 영역의 권리는 온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낡은 생각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여성에 대한 ‘혐오’라는 퇴행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유지될 수도 없고 유지되어서는 안 되는 가부장제의 권력자들인 남성이 과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신장으로 남성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억지’는 이런 집착의 유치한 표현이다. 있지도 않은 가부장의 권위, 남성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분노할 때, 남성들은 근거 없는 분노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가 묘사했던 잔혹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만큼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는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와 작별해야 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여성들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럴 때에만 남성들도 퇴행적인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미 많은 남자들이 낡은 ‘남성’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세상은 변해 왔다. 세상은 변해야만 한다. 그리고 세상은 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