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의 4ㆍ3시민아카데미] (5ㆍ끝) 4ㆍ3유적지 현장답사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 관내 주민 132명이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학살됐다. 당시 유족들은 6년 간 시신 인도를 강력히 거부하던 군 당국과 가까스로 타협을 본 후 흙탕물 속에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양수기까지 동원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습한 시신은 구별이 어려워 ‘백조일손’(百祖一孫; 서로 다른 조상들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들은 모두 한 자손이다)이라 정했다.

4ㆍ3전문기자와 4ㆍ3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낸 김종민의 ‘4ㆍ3시민아카데미’는 인터넷신문 <제주의소리>가 4ㆍ3 7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자리다. 5차례에 걸쳐 4ㆍ3의 전 과정과 과제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강좌다. 제주대신문은 학생들의 4ㆍ3에 대한 배경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 5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주>.

4ㆍ3유적지 현장답사는 제주4ㆍ3평화기념관과 너븐숭이 유적지, 서우봉 일제동굴진지, 송악산 섯알오름 고사포진지, 백조일손 학살터 등 4ㆍ3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현장답사의 첫 방문지는 제주4ㆍ3평화기념관이다. 제주시 거친오름 기슭의 4ㆍ3평화공원에 들어선 이 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1만1455㎡ 규모로, 제주의 설문대할망 설화를 바탕으로 4ㆍ3의 모든 아픔을 담은 그릇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기념관뿐만 아니라 4ㆍ3희생자 1만3900여기의 위패를 모신 위령제단과 위령탑, 행방불명인 표석 등이 있다.

전시실은 제주4ㆍ3의 전개 과정에 따라 ‘역사의 동굴’, ‘흔들리는 섬’, ‘바람타는 섬’, ‘불타는 섬’, ‘흐르는 섬’, ‘새로운 시작’ 등 6개 상설관과 희생자 유해 11구가 발견된 ‘다랑쉬굴’의 현장을 재현한 동굴 등 2개의 특별관이 꾸며졌다.

또 4ㆍ3관련 문화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전시실과 어린이체험실 등이 마련됐다. 기념관의 외곽에는 독일 베를린시가 기증한 ‘베를린 장벽’ 2개가 설치됐다.

4ㆍ3평화기념관은 제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르게 정립하고 도민의 안타까운 희생을 기리는 산 증인과 같은 곳이다. 4ㆍ3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산실로 지난 한 해 20만명이 방문했다.

1948년 11월 17일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 해안선에서 5km 이상을 불바다로 만든 이른바 초토화 작전에 대한 설명에서는 참가자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김종민 대표는 “4ㆍ3의 잔인함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며 김익렬 장군과 문형순 경찰서장, 김성홍 신흥리 구장, 서청단원 고희준씨, 강계봉 순경 등 의로운 사람들의 대한 기억도 당부했다.

정다현(13ㆍ이도초 6)양은 “학교에서 4ㆍ3에 대한 수업이 있었지만 기념관을 직접 보니 당시 어른들의 아픔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에 제 올린 참가자들

북촌리는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지만 서우봉과 접해 ‘해동’이라는 마을이 서쪽에, 또 산간 선흘리 방향으로 ‘억수동’이란 마을이 흩어져 있었다. 북촌리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자의반타의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1948년 12월 16일에 첫 번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했던 24명의 주민들이 느닷없이 군인들에 끌려가 동복리 ‘난시빌레’에서 집단총살 당한 것이다.

이 엄청난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49년 1월 17일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ㆍ3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서쪽들과 밭에서 자행됐다. 이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희생됐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많은 흔적들이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과일과 떡 등 제사음식을 올리고 어린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짧은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혼령을 달랬다.

아픔 간직한 섯알오름 고사포진지와 학살터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섯알오름 고사포진지는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수세에 몰리자 당시 전략적 군사시설인 알뜨르비행장 보호를 위해 섯알오름에 고사포 진지를 구축했다. 이 역시 주민들을 강제동원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고사포 진지 남쪽 기슭에는 4ㆍ3당시 100여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섯알오름 학살터가 있다. 이곳 학살터는 4ㆍ3유적지이기도 하지만 그 이후, 예비검속 유적지라고도 볼 수 있다. 육지에 보도연맹사건이 있다면 제주에는 예비검속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 당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다. 이때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을 검속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ㆍ한경ㆍ대정ㆍ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다. 이들 중 약 150명을 대정읍 상모리 고구마 창고에 수감했다가 1950년 8월 20일 새벽 4-5시께 이곳에서 집단학살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트럭에 올라 섯알오름에 끌려가던 사람들은 곧 자신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군인들 몰래 트럭 뒤에 곰방대나 고무신 등을 버려 자신들이 죽은 후, 가족들이 그 흔적을 보고 시체라도 찾아주기를 바랬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6년여가 지나서야 시체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김 대표로부터 백조일손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경청하고 희생자 추모비가 위치한 위령제단에 올라 고개를 숙였다.
현장답사를 마무리하며 김종민 대표는 억울한 희생을 당한 4ㆍ3의 아픔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표는 “70년 전 대학살을 경험한 젖먹이부터 10대까지, 지금은 우리 주변의 어르신들”이라며 “아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공동체를 복원한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인터넷신문 <제주의소리>가 4ㆍ3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4ㆍ3시민아카데미’가 4ㆍ3유적지 현장답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4ㆍ3시민아카데미는 앞서 4ㆍ3의 개요와 초토화작전, 불법계엄령, 군법회의, 진상규명운동사 등에 대해 시민강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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