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 연특별기자

올해 여성운동단체인 제주여민회에 2030위원회가 생겼다. 위원 중 유일한 30대여서 얼결에 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위원회가 생겨난 배경은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여민회에서 진행했던 ‘2030 제주 여성 페미니즘 아카데미&캠프’에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꽤 많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다.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다양한 관심사를 매개로 제주의 청년 페미니스트 혹은 영영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 위해 위원회를 꾸렸다. ‘여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제주에서 새로운 상상을 펼쳐나가는 것이 활동의 목표이다. 지난 5월부터 2018 제주청년 페미니즘 아카데미 ‘돌, 바람 그리고 페미니스트’ 강연 일정을 시작하면서 북클럽과 무비클럽까지 스펙트럼을 넓혔다.

9월 11일 제주 청년다락에서 세 번째 강연을 열었다. ‘여성 대표성과 정치 세력화’를 다룬 ‘정치, 이젠 여성이 할 때!: 말하다, 행동하다, 도전하다’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청년들이 다소 거리감을 느낄 주제이나 짚어야만 했다. 격변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대표성’과 ‘정치세력화’는 핫이슈이다. 제주사회에선 그 필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선거에서 주체로 떠오르기 시작한 청년 세대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흔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 해녀’를 ‘강인한 제주 여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꼽는다. ‘바당(바다)밭’과 ‘육지밭’을 오가며 가계를 이끌고, 출산과 육아에 가사노동까지 도맡아야 했다. 여기에 전통이라는 이름이 덧대어지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주 여성은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다. ‘제주 여성은 생활력이 강하다’, ‘뭐든 요망지게(야무지게) 잘 해낸다’며 제주 여성들에게 수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끝없는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강인한 제주 여성’이라는 담론 이면에는 너무나 초라한 현실이 제주의 여성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 사적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발휘되는 ‘요망진’ 제주 여성의 면모는 정치영역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공적 영역에서 제주 여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성 평등 의식은 점차 나아지고 있고 ‘성별영향평가’, ‘성 인지 통계’ 등 제도가 뒤따라도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행정기관의 고위직이나 선출직 정치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것이 현실이다. 제주지역에서 여성 의원이 선출된 것은 2014년 2명의 의원이 처음이었다. 20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지역구로 출마해 당선된 여성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그토록 제주 여성이 요망지다면 어째서 공적 영역에선 그들의 존재를 찾기 힘든 것일까? 이것이 이번 강연의 주요한 물음이다.

지난해 제주여민회에서 ‘여성친화도시 제주 실현을 위한 제주 여성 100인 원탁회의’를 열었다. △정치 △안전 △경제 △문화 △돌봄 등을 주제로 다루는 자리에서 처참한 현실을 나타내는 여러 지표가 나타났다. 제주 여성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분야를 묻자 ‘유리천장을 뚫자’는 응답이 33%를 차지하며 1위로 꼽혔다.

과연 현실이 어떤지를 살펴보자. 여성이 대표를 맡아본 경험을 묻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회가 없고 의견이 묵살된 경우가 40%로 절반에 가까웠다. 스스로 수동적인 의식으로 단념하는 경우도 20%로 다섯 명 중 한 명이었다. 실제 사례를 들자면 주민자치위원회의 부위원장 2명 중 1명은 여성이어야 한다. 위원장은 줄곧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인 부위원장은 손님이 오면 의전이나 다과를 준비하는 한정된 역할이 주어진다.

기초적인 정치 단위인 ‘리’에선 여성의 위치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주지역의 172개 리에서 여성 이장은 10년 가까이 1명뿐이다. 올 들어 그나마 3명으로 늘어났다. 여성이 이장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마을마다 아직 남아있는 포제 탓이 크다. 피를 흘리는 여성은 신성한 제단에 설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문중 행사와 각종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성의 몫으로 떠밀면서 여성의 존재는 그림자로 취급돼 왔다. 모순이다

이렇듯 여성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더라도 남성 가부장 중심의 제례에서 주어지는 역할은 그저 ‘부엌데기’일 뿐이다.

문중에서 비롯된 남성 가부장 중심의 문화가 정치영역까지 지배하는 지역사회에서 딸과 며느리는 설 자리가 없다. ‘여성이 어떻게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이 돼?’, ‘여성이 이장이 되면 마을 포제를 지내지 않겠다’는 인식은 감히 유리 천장에 손도 뻗지 못하게 한다.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이 상황을 마주보지 않으면, 유리 천장은 계속 유리 천장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제주 청년 페미니즘 아카데미에 ‘여성 대표성’, ‘여성의 정치세력화’라는 주제를 넣은 이유이다. 이것들을 들추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고 고착화되어버린 남성 가부장 중심의 사고와 구조를 낯설게 보게 하고 의문을 갖게 하고 불균형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퍼지면서 변화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올해 지방선거로 선거구에서 뽑힌 3명과 비례대표 5명 등 합쳐서 8명의 여성 의원이 제주도의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도 눈에 띄는 숫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민선 도지사 후보로는 가장 처음으로 여성 후보가 나와 의미 있는 지지율을 얻었다.

제주여민회가 청년다락에서 ‘정치, 이젠 여성이 할 때!: 말하다, 행동하다, 도전하다’를 주제로 세 번째 강연을 열었다.

이번 강연에는 정치현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여성정치인들이 나섰다. 지난 6ㆍ13 지방선거에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된 강성의 제주도의회 의원(화북동)과 제주지역 최초로 여성ㆍ청년ㆍ이주민 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고은영 제주녹색당 공동위원장이 주인공이다.

여성학 강사로, 현장활동가로 경험을 쌓아온 강성의 의원의 이력은 ‘여성’을 떼고 말할 수 없다. 일찌감치 정치를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보폭을 넓혔다. 지역에서 정치를 하기 위해 지난해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다. ‘정치하려면 제주 남자를 만났어야지’라는 세간의 편견에 반박하듯, 배우자와 자녀를 부르지 않은 채 홀로 유세 활동을 펼쳤다. 마침내 11대 제주도의회에 입성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주도성을 잃지 않으려고 버텨온 시간들이 배경이었다. 그가 ‘당사자주의’를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제주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고은영 위원장은 3.5%의 지지를 얻으며 다섯 명의 후보 중 3위를 기록했다. 그는 녹색당의 시민 경선과 기탁금 마련 캠페인을 거쳐 어엿한 후보가 됐지만 선거 기간 내내 ‘완주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선거 후에는 ‘의미 있는 지지율’로 ‘졌지만 잘 싸웠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어떤 당보다 ‘궨당’이 가장 강하다는 제주에서 이른바 ‘근본 없는’ 후보로 지역 정치의 작동 방식에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문중과 종친 중심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고, 정당 내 공천심사료와 기탁금 없이는 레이스조차 뛸 수 없는 현실에 누군가는 맞서고 있다. 지금은 ‘정치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이 조짐은 4년 후, 8년 후엔 변화가 되어있을 것이다. 제주의 청년으로, 여성으로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룰에 의해 가로막혀버린 유리 천장을 더듬어 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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