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리암 니슨은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액션스타로 각광받고 있다. <테이큰>에서 그가 맡은 역은 전직 첩보요원이며 유럽여행 중 납치된 딸을 구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뜬금없이 니슨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 때문이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공적 위험뿐만 아니라 일상화된 동료 인간들로부터의 위험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특수부대 요원이나 첩보원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서글픈 생각이었다.

공적인 공간은 사람들이 마주치고 이야기 나누면서 교감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감시하고 잠재적인 범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조금 후미진 곳, 그리고 깊은 밤 도시 곳곳은 위험과 공포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인간의 미덕은 점점 동물의 왕국의 ‘폭력’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불특정 타자를,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폭행하고 죽이는 세상이다. 단돈 몇 천 원 실랑이에 PC방 아르바이트 청년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살풍경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곳곳을 감시카메라로 감시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영화 속 리암 니슨처럼 ‘놀라운’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대개 니슨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그가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전기고문을 자행할 때조차 관객은 그에게 공감한다. 폭력의 대상이 악당이기 때문이다. PC방 청년의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 우리의 관심은 범인이 심신미약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의 신상공개에 맞춰져 있다. 범인은 악당이며 이미 인간 대접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섬뜩한 대목이다.

살인은 결코 용서될 수 없다. 심신미약을 핑계로 단죄를 피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심신미약과 신상공개를 둘러싼 소란스러움에 묻혀 우리 사회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며, 그 분노와 좌절이 치유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과 인간적 유대마저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슨이 연기한 브라이언 밀스가 될 수 없다. 카메라의 감시와 엄격한 처벌도 범죄를 막지 못한다. 어쩌면 감시와 처벌은 좌절로 분노한 사람들을 폭발하게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다움의 밑단으로 밀려날 때, 위로받기 보다는 패배자로 ‘비난’ 받는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상태인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료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회복이다. 실패가 위로받고 좌절이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도록 서로 돕는 사회적 연대 말이다. 이제 우리는 브라이언의 폭력에도 민감해져야 한다. 모두에 마음 속에 뿌려진 ‘폭력’의 씨앗을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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