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넘어 증오에 익숙한 사람들
낯선 이를 인정하고 관계 맺어야

김 치 완철학과 교수

“전두환이 경제는 잘 했나요?” 게으른 휴일 아침상에 앉은 중2 막내가 묻는다. 언젠들 경기가 좋았으랴! “아니!” 그러자 막내는 눈을 크게 뜨고 기대에 부응한다. “경제는 좋았다고 하던 걸요!” 그래, 예상했던 말이다. 적폐청산의 당위를 뚫고 슬금슬금 일어난 경제가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이 여론을 휘젓고 있으니까. “집 살 돈으로 놀러 다니면 살림살이가 나아진 거니?” 아! 골계미(滑稽美)는 있으되, 잘못된 비유의 오류를 범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생각할 찰나에 막내가 되묻는다. “아! 박정희가 모아 둔 돈을 전두환이 쓴 거군요?” 기특하기는 해도 정답은 아니다. “박정희가 모아 둔 돈이 아니고, 국민들이 모은 돈이지!” 이렇게 해서 장모에게 혼날 이야기를 또 한 번 한 거다.

맏사위를 아들처럼 대해주는 장모는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김서방, 이번에는 박근혜 찍게. 막말로 박정희 없었으면 우리 다 굶어죽었을 걸세.”로 시작한 대화를 끝낼 때를 빼고는 말이다. “우리가 잘 살게 된 거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덕이고요. 나라꼴이 엉망인 건 박정희 탓인 겁니다.” 경솔했다고, 그렇게까지 말씀드릴 건 아니었다고 몇 번이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결혼예물로 삽을 주고받았으며, 식량자급자족을 한다고 밥그릇 사이즈를 줄여야 했던 그 고된 시절을 겪고도 오히려 독재자의 딸을 걱정하시는 데 발끈했던 거였다. “자네는 책으로만 배워서 그 시절을 몰라 그래. 알았네, 자네가 찍고 싶은 사람 찍게. 이제 그만 하세.” 장모는 이렇게 얼굴을 붉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되었다. 그날 담배를 다시 끊었다. 십 년을 끊었다가 피우기 시작한 지 5년째였다. 진즉 끊으리라 생각했던 터라 그만한 계기도 없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기에는 때늦었으니, 안내도 되는 세금이라도 보태지 않으렵니다.” 안 피우던 사람도 피우게 될 5년을 담배도 없이 어떻게 견디겠느냐는 농담에는 이렇게 응수했다. 유난을 떤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장모의 말씀대로였다. 아직 어린 시절이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지만, 본래 책으로 배운 게 더 생생한 법(hyper-real)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차마 참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不忍人之心)”이고, 분노이며, 증오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이렇게 증오에 익숙했던 나라였다. 일제강점기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아카(あか; 赤)라고 부르던 반일주의자들에 대한 증오가 최적의 수단이었다. 그 용어는 ‘빨갱이’로 번역되어 냉전시기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되었고, 민주화 이후에는 ‘종북(從北)’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것은 “인류가 진화하면서 터득한, 가까이 하면 신체적, 사회적 병해를 입게 되는 대상을 멀리하는 감정”이라는 혐오를 넘어선다. 곧, “사무치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인 증오다. 이런 증오에 익숙했던 탓에 유색인종 차별, 성 소수자 혐오, 여성 또는 남성 혐오 등과 같이 우리 내부에 있었던 감정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SNS가 보편화되면서 혐오 정서가 부각되었다는 진단과도 일치한다.

혐오는 본래 타자화된 이들,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둔 생리적 감정이다. 영화 곡성(哭聲)의 모티브이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낯선 이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전염병’의 전파를 막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2017년 이후로 다양한 혐오의 양상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동안 대한민국을 유지해오던 일방적인 증오가 옅어졌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양성과 개방성으로 보장된 개인주의가 가속화되면서, 혐오의 감정이 ‘극혐’을 거쳐 증오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퇴행이다. 두려움은 자신보다 열등하거나 악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를 제물로 삼는 ‘낙인찍기’를 통해 극복될 수 없다. 오히려 상대를 건전한 이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이제 막 증오사회를 떠나 혐오사회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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