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동매립반대운동의 정치과정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이후 제주지역에서는 주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1년 탑동 매립을 둘러싼 위법성 여부가 언론에 드러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대학생들이 적극 참여한 가운데 불법매립에 따른 개발이익환수운동으로 미화됐다. 사진은 남문로 시민회관입구에서 행진에 나서고 있는 시민단체 학생들의 시위장면으로 "탑동불법개발이익 쟁취하자"는 플래카드의 구호가 선명하다. 1900~2006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제주특별자치도 2009 발췌 김기삼 사진

 

정 영 신

공동자원과 지속가능

사회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2018년은 4ㆍ3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작년부터 4ㆍ3의 남은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제주 내외에서 개최되어 왔다. 그런데 올해는 제주 주민운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거론되는 탑동매립반대운동(또는 탑동투쟁)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지난 10월 31일 ‘제주 탑동매립반대운동 30주년 기념 학술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 과거의 주민운동을 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의미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주민운동이 전개된 시대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탑동매립반대운동의 시대적 배경

먼저, 탑동매립반대운동은 1960년대부터 진행된 제주도 개발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시작된 제주도 개발정책은 국제자유지역 구상, 관광개발 프로젝트, 산업개발정책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핵심은 관광개발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제주의 풍부한 자연자원과 인문사회자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 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제주를 중산층의 수요에 필요한 국민관광지로 육성했다. 이러한 관광개발 프로젝트는 공항, 항만,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급속하게 확대시켜 제주도민의 생활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국가주도의 대외지향적인 관광개발은 지역주민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국내외 독점자본과 투기업자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사례가 늘어갔다.

한편, 4ㆍ3이후의 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제주의 지역주민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주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성장했다. 제주 지역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성격을 띠면서도 4ㆍ3진상규명운동이나 관광개발에 반대하는 주민운동과 결합되면서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민주화운동과 구별된다. 제주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제주국본은 1987년 12월의 대선투쟁뿐만 아니라, 1988년에 들어서면서 탑동매립, 새한병원투쟁, 제주MBC개표조작사건, 송악산군사기지설치 문제 등 지역사회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탑동매립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탑동 공유수면 매립 문제의 전개

탑동매립반대운동은 공유수면이던 탑동 해안의 매립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주민운동이다. 원래 ‘공유수면(公有水面)’이란 바다와 바닷가, 그리고 하천ㆍ호소ㆍ구거, 기타 공공용으로 사용되는 국가 소유의 수면 등을 일컫는 개념이며, 이때 공유수면의 ‘매립’이란 공유수면에 흙이나 모래, 돌 등의 물건을 인위적으로 채워 넣어 토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말한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공유수면은 바다처럼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인류 모두의 것이거나, 제주의 용천수처럼 민중들의 생계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어서 지역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관리하던 자원이었다. 즉, 공유수면은 우리 모두의 것 혹은 공동의 것으로서 공동자원(commons)으로 불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근대국가는 배타적인 영토권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공유수면을 국유화하는 한편, 이를 매립한 토지에는 사적 소유권을 부여했다. 예컨대, 1923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공유수면매립법령은 공유수면을 매립한 자에게 매립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해방 이후에 공유수면매립법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쳤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유사했다. 공유수면의 매립은 광대한 토지를 창출함으로써 공공의 복리를 증진시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거대한 폭력의 행사이며 공동의 부를 사유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환경의 가치와 공공성의 고려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1976년 제주시는 탑동 지역의 해일 피해를 방지하고 해안도로를 개설하여 임해관광단지를 조성할 목적으로 탑동매립계획을 수립했고, 제1차 매립은 1980년 5월에 완공되었다. 1982년에 제주시는 제2차 탑동매립 기본계획안을 수립하는데, 사업비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서 민간참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제주시 소재 제주해양개발(주)과 광주시 소재 범양건영(주)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공동으로 매립면허를 신청했다. 그리고 1986년 12월 24일에 매립면허가 발급된다. 그런데 이미 국회에서는 공공성을 강화한 형태의 공유수면매립법 개정안이 그해 12월 17일 국회를 통과하여 31일부터 적용될 예정이었다. 즉, 이들의 매립면허는 신법의 발효 며칠 전에서야 부랴부랴 구법을 따라서 발급되었던 것이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정경유착의 결과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탑동 해안을 이미 이용하고 있던 어촌계나 잠수회의 동의서도 제대로 받지 않았으며, 보상금을 불공정하게 배분하고 먹돌을 매립지 밖으로 옮기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해녀들의 반발을 샀다.

▶탑동매립반대운동의 전개 과정

1988년 3월 8일 제주시 삼도동 잠수회 회원 43명은 “어민생계 보장하라”, “범양건영은 계약을 철저히 이행하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매립공사 현장사무소를 점거했다. 이들의 농성은 4년여에 걸친 반대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가족을 위협하거나 행정당국이 마을의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등 탄압이 있었지만, 해녀들은 공동작업 과정에서 형성된 강한 조직력으로 50일 동안 농성을 이어갔다. 결국 사업자가 피해의 일부를 보상해주기로 하면서 해녀들의 점거 농성은 끝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해녀들의 투쟁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곧바로 제주대 학생들과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3월 23일에는 제주대 탑동불법매립공동대책위원회(제주대탑대위)가 꾸려졌는데,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매립면허 발급의 불법적인 측면들을 밝혀내고 폭로했다. 제주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매립면허의 취소를 요구하면서 사법당국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경찰과 검찰은 사업자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매립공사가 점차 진행되자 1989년 2월에는 탑동불법개발이익환수투쟁 도민대책위원회(탑대위)가 결성되어 개발이익의 환원을 본격적으로 요구했고, 제주대 교수들과 재야단체들도 성명을 내는 등 도민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탑대위를 비롯한 제주사회는 매립 토지의 환원을 요구했지만, 범양건영측은 토지나 현금이 아니라 제주시가 필요로 하는 시설물을 조성하여 기부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결국, 제주시와 제주도는 제주 시민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탑동에서 오라동 소재 종합경기장에 이르는 병문천 2.3km구간을 복개하여 제주시에 기부채납하겠다는 사업자측의 제안을 수용하고 말았다. 1989년 말에 조직된 탑동문제해결을 위한 범도민회는 개발이익 환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범도민적 공론장을 유지했지만, 1990년 이후에는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문제로 이슈가 옮겨가면서 탑동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탑동매립반대운동의 영향과 유산

탑동매립반대운동의 결과와 영향은 복합적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탑동매립반대운동은 탑동의 공유수면에 대한 불법적인 매립공사를 저지하지도 못했고 개발이익의 환수라는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지도 못했다. 범양건영이 불법적인 개발사업의 대가로 제공한 병문천 복개사업은 제주도감사위원회의 감사 결과 부실공사로 드러났고, 병문천은 오늘날 태풍과 장마 때마다 대표적인 수해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탑동매립반대운동은 제주 지역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우선, 이 운동은 제주 주민운동의 폭발을 이끈 운동이었다.

해녀들의 점거와 농성투쟁은 제주의 다른 지역민들에게도 자신감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1988년 5월 이후 신촌리 대섬유원지, 사수동 하수종말처리장, 한림항 매립공사, 도두동 분뇨처리장, 서귀포 해녀들의 어장을 둘러싼 주민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주지역 주민운동론』(부만근, 1997)에 따르면,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제주에서 48건의 주민운동이 ‘폭발’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제주의 정치적 공간에 ‘주민’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둘째, 탑동투쟁은 지역주민들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제주도 차원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집회나 시위의 제목에 ‘범도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사용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범도민회’라는 이름은 제주도개발특별법반대운동 과정에서 다시 출현했으며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범도민’이라는 언어는 행정구역으로서 제주도에 사는 사람 혹은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시민이나 국민의 일부로서 호명되는 ‘제주도민’과 달리, 지역의 생활공간에서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새로운 정치적 지향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민운동의 폭발과 ‘범도민’이라는 이름으로의 수렴은 제주 시민사회의 탄생 혹은 지역 현안들을 정치적으로 구성해 내는 제주형 공론장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일지 모른다.

셋째, 1988년에 시작된 탑동매립반대운동과 송악산공군기지설치반대운동은 제주사회에 환경과 평화의 가치를 각인시킨 운동이었다. 특히 탑동 해녀들의 투쟁에 제주대의 대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이 결합한 배경에는 탑동 해안이 제주도민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탑동 해안이 공유수면으로서 지니는 환경적인 가치나 매립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문제도 중요하게 거론되었고, 따라서 매립으로 인한 개발이익을 제주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요구도 출현하게 되었다. 즉, 오늘날 제주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거론되는 환경과 평화의 가치들은 제주에서 공론장이 본격적으로 출현한 초기부터 이미 거기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민/주민 주체의 개발을 실현하고 개발이익을 환수하라는 당시의 요구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탑동매립반동운동과 뒤이은 여러 주민운동, 사회운동들은 환경과 평화의 가치, 개발에 대한 도민/주민의 권리, 개발의 공공적 성격에 관한 여러 질문을 남겼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당시의 운동들을 돌아보고 기념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질문들을 마주하는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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