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민 성 철학과 1

감독 홍상수는 본인의 세계를 꾸준히 관철하면서도 다양한 변주를 통해 매 작품마다 다른 색을 부여하여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아왔다. 하지만 그는 긴 다작 활동 속에서도 ‘죽음’이라는 테마만큼은 늘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일상의 반복과 차이 속에서 인간의 위선과 무지를 들추어내는 그의 작업에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개입된다면, 삶의 흐름에는 균열이 생기며 서사가 그 파장 자체에 이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작 ‘풀잎들’에서 그는 이러한 화두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욕망의 대상에게 노골적으로 구애하던 위선자는 자취를 감추었고, 죽음의 기운이 맴도는 흑백의 삶에서 어떻게든 살고자 버둥대는 현재의 유령만이 남았다. 감독의 어느 영화에서든 가장 찬란한 광휘를 내뿜던 오브제 김민희는 어느새 관찰자가 되어, 생의 무력감과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가녀린 의지를 관조(혹은 관음)한다. 우리를 옥죄는 죽음의 기운 속에서, 그럼에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마주한 홍상수는, 이전보다 더 처연하고 엄중해 보였다.

 홍상수는 자신을 짓누르는 딜레마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도 이를 교묘히 회피하는(그럼으로써 이에 대항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매혹적이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풀잎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극중 인물은 하나같이 죽음의 징조로부터 도피하거나 애써 망각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오해를 사며, 결국에는 비루해진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초췌해진 영혼들은 막판에 술자리를 가짐으로써 불안의 무게를 잠시 벗어던진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비겁한 도피에 마냥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관찰자 아름 역시 결국 지상으로 내려와 죽음의 공기가 일렁이는 술자리에 발을 들인다. 내일의 숙취에는 사멸의 전조가 스며들어 있겠지만, 오늘 밤의 만취에서 박동하는 생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기에. 마지막 내레이션이 고하듯,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도 모르고, 예쁘고 단정하게 놀고 있으니까”. 그 놀이는, 아니 투쟁은 보잘것없을지언정 결코 무가치한 것은 아니리라.

 생의 끝에 죽음이 있음을 체감할 때, 그래도 다시금 삶을 갈구할 때, 그 과정에의 구차함이 때론 숭고함과 다르지 않다고 자위할 때, 당신은 비로소 독한 담배 연기에도 끈질기게 돋아나는 풀잎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단 한 가지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거짓된 위안일지라도 충분히 아름다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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