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신문>이 1000호를 발간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27일에 첫 호가 나왔으니 60여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지금에 이르렀다. 현대사의 굴곡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제주대신문이 지켜보고 견뎌온 시간이 녹녹치 않았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ㆍ3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안고 4ㆍ19 혁명과 5ㆍ16군사쿠데타를 지켜보았으며, 유신독재와 이에 대한 저항, 12ㆍ12군사반란과 신군부의 독재, 5ㆍ18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을 거쳐 97년 외환위기와 2016-7년 촛불광장까지 극적인 역사를 함께 해 온 것이다.

노골적인 폭력의 세월 대학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근거지였다. 특히 학생들은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는 행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기꺼이 나섰다. 독재 권력은 폭력을 통해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저항의 강도는 누르는 폭력의 강도에 비례했다. 협박과 탄압은 마음속에 자라나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저항의 싹을 자를 수는 없었다. 대학은 그 싹이 트고 자라는 토양이었다.

우리시대 기성세대가 흔히 범하는 오류는 과거 살아온 흔적을 되돌아보며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현재 청년세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비교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무기력을 질타하기도 한다. 이들의 태도는 종종 이율배반적이다. 한편으로 자신들의 ‘희생’으로 성취한 민주주의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현실을 한탄하며 젊은이들의 패기와 비판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세태를 비판한다. 훈계조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체되어있고 모순투성이인지를 말한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저항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 소수의 정치인집단과 재벌의 권위주의적 권력독점을 뿌리 뽑는 데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기득권과 타협하고 그것을 민주주의로 눈가림한 자신들의 ‘비겁함’이 현재의 문제를 낳고 있다는 점은 애써 외면한다. 

대학으로 시야를 좁혀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대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더 깊게 만드는 근시안적 조치들을 해결책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한답시고 아무런 ‘권위’도 갖지 않는 일간 신문의 대학평가 기준에 맞추어 순위를 쉽게 올릴 수 있는 항목을 중심으로 대학예산을 집행한다. 교수들의 연구역량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양적으로 업적을 평가하지만 학문의 상업화를 조장할 뿐이다. 

이제 대학교수 집단의 핵심을 담당하게 된 민주화운동 세대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다. 정치적 무기력을 객관과 중립으로 가장한 채 점잖게 뒷짐을 지고 훈계조로 말하거나, 사적인 자리에서 격정적으로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가지를 생각조차 못 한다. 지금의 현실을 만든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이 노골적인 폭력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일상과 몸에 스며드는 ‘부드러운’ 폭력으로 다가왔을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폭력이 속삭이는 권력의 논리를 몸에 새기고 실천했다. 수동적이고 탈정치적인 제자들을 ‘비난조’로 힐난하면서 대학이 돈의 논리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때, 그리고 동료교수들과 업적을 다투는 치킨게임에 내몰릴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대학이, 그리고 대학의 핵심인 교수집단이 저지른 세 가지 오류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말한 것처럼 부드러운 모습을 한, 하지만 더 미세하고 깊게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폭력’을 간과했다. 부드러운 모습의 폭력은 노골적인 폭력이 자행되던 시기 저항의 근거지였던 대학마저도 식민화시켰지만 대학의 지식인들은 앞장서서 폭력의 형태변화를 민주화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다. 둘째, 대학이 새로운 폭력의 논리, 화폐와 상품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었기에 학문의 토대가 되는 지식추구는 설 땅을 잃어버렸다. 연구는 금전적 보상을 위한 도구가 되었으며, 강의는 얕고 실용적인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대학이 앞장서서 지식추구와 이에 동반되는 윤리적 태도 따위는 목적성취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도록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실천은 결국 대학의 존재이유를 허물었다. 대학이 취업학원이 되어갈 때, 캠퍼스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돈 안 되는 학문분과를 솎아내는 것을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업가 흉내를 내는 총장들이 대학을 좌지우지할 때 ‘숭고한’ 민주주의를 실천한 ‘지식인들’은 연구실과 강의실로 몸을 숨기고 민주화를 빌미로 사회적 저항과 실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권위주의와 기득권은 향유하는 집단으로 타락하는 스스로를 경계하지 못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물이 썩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고여 있지 않은 물이다. 대학의 학생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문제는 민주화세대라는 헛된 자긍심과 시장주의적 경쟁의 논리를 어정쩡하게 버무린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좁고 협소한 둑 안에 가두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청년들은 불만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협소한 둑 안에 갇혀 버린 청년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혐오를 쏟아내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회를 비판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것, 즉 둑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데에는 서투르다.

여기가 대학언론이 새롭게 도약해야할 지점이다. 기성세대의 이율배반을 질타하고 대학을 진리추구의 장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둑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물이 샘솟지 않는 우물에서 나와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듣고 토론해야 한다. 공론장의 토론을 통해 상대보다 스스로에게 더욱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겨눌 수 있는 태도를 학습해야 한다. <제주대신문>은 듣고, 말하고, 토론하는 대학의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100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제주대신문>이 짊어져야 할 과제의 무게이어야 한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