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게시판에 기자 모집 글을 보고 언론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도전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수습기자가 되면서 고민도 많아졌다. 그리고 전공 공부, 학점 관리, 세계화 시대의 필수 조건인 영어 성적, 아르바이트 등 바쁜 일상과 함께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불안감,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수습시절은 혼자만 분주하고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나 혼자 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신문사에 몸담은 많은 사람이 겪게 되는 과정이자 수시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음을 기자와 데스크를 맡으면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아니 선택의 갈림길에 있을때 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명구를 들려주며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준 주간교수님과 선배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끝까지 견디자며 스스로 다짐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경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간혹 기사 때문에 예를들어 실습비 사용용도 등 때문에 학과 교수님들과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새로운 취재가 결정되고 그 결과가 활자화되어 독자들에게 읽히고, 그 문제가 개선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학술부장으로 담당 면을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맡게 되면서 얻게 되는 경험도 큰 보람이었다. 그리고 대학신문의 자산은 ‘맨 파워’였다.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나름의 언론 및 홍보 베테랑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빛나는 통찰력을 가진 멋진 선배님과 동료가 주변에 많이 있었기에 그들이 일하는 방식, 논리적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과정들 모두가 큰 배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때론 무서우리만큼 차가운 선배들의 질책과 충고도 있었지만 배울 점이 많은 분과 함께 일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또한, 학생기자로서 다양한 학과의 독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에 관한 관심과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매 순간 신문을 발행하면서 선후배 동기들과의 열띤 토론을 벌이고 그들로부터 조언들을 들었으며 그것은 나의 청년기 가치관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그 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성공적인 3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마지막으로 육지에서 섬으로 유학 온 고학생이었던 나에게 신문 발행을 준비하면서 교정을 보고 늦은 밤 하교길에 학교 정문 앞 ‘소림사’ 라고 불리던 무허가 식당에서 선배님들이 사주던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수북하게 담겨 나온 얼큰한 김치찌개의 맛은 특급 호텔 셰프가 요리한 그 이상의 음식으로 지금도 잊지 못할 행복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나도 제주의 집이 연말에 준공되면 내려가서 그 당시의 선배님들처럼 후배들을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격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