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건 일(83년~86년 학생기자)

30여 년 전의 일이다. 제대신보 기자들은 성산포항에서 우도를 잇는 도항선 ‘자연호’에 몸을 맡겼다. 부챗살 같은 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바다를 가르는 바람은 싱그러웠다. 기자들의 하계연수를 겸한 특집 취재를 위해서다. 기름 냄새 가득한 배는 20분가량을 몸살 앓듯 힘겹게 통통거리고 나서 우리 일행을 우도의 천진항에 내려주었다. 우도는 참 아름다웠다, 꺼억 대며 우리를 반기는 갈매기 떼, 초록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신록으로 빛나는 우도봉, 은 싸라기로 온통 반짝이는 산호해수욕장, 바다 곳곳에서 정겹게 들려오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마을을 감싸는 고요와 정적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도의 낭만과 평화를 즐기기엔 일렀다. 우리의 얄팍한 고행이 시작된 것이다.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없는 섬이었다. 우리가 야영하기로 한 저수지 부근까지 4박5일간 먹을 양식과 대형 텐트를 온몸에 짊어지고 걷고 또 걸어서 현장에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데 하늘엔 벌써 은하수가 뒤덮였다. 다음 날 뒤늦게 합류한 유영만 기자, 제주시에서 산 참외 한 자루를 둘러메고 낑낑대며 캠프에 올라오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도사람들을 만났다. 소섬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던 이곳 사람들은 천900년에 마을 훈장을 하던 오모씨에게 부탁해 마을 이름을 연평(演坪)리로 바꿨다는 사실도 알았다. ‘물에 뜬 두둑’ 얼마나 운치 있는 표현인가, 이 때만 해도 우도는 구좌읍 연평리였다. ‘우도에선 딸이 많아야 부자’소리를 듣는다 했다. 인구분포도 여자가 많았다. 천초와 톳, 미역을 주로 생산하고, 주민들의 소득원이 되다보니 해녀가 많은 집안이 잘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해녀들은 고된 바다작업으로 인해 온갖 질환을 앓고 있었다. 뭍 나들이가 불편해 웬만한 질환은 참고 견딘다는 것이다. 지하수가 없어서 식수나 생활용수는 빗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경관이 좋다는 소머리 오름 일대의 땅 12만 평방미터가 서울사람에게 팔렸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 무렵 우도에 대한 외지인의 땅 투기가 시작된 것이다. 우도가 앓기 시작한 것이다.

30년 전의 우도는 그렇게 아름다웠고, ‘르뽀- 바다에 보람을 싣고 꿈을 캐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제대신보의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지금의 우도는 어떤가, 개발이란 이름아래 황망하게 파헤쳐졌다. 자본가들이 넘치고 자동차는 교통지옥을 만들었다. 다시 우도취재를 떠 올리는 것은 제주의 미래를 보다 심각하게 고민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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